iulius 2009. 4. 17. 07:58

다음 날 보니 애기씨의 무릎엔 보랏빛 피멍이 들어있었다. 산에서 나무 할 때 꺾어온 각시 붓꽃의 잎을 소꿉놀이하듯 돌로 짓찧어 무릎에 붙여 드리니까 애기씨께서 전날 나무 위에서의 그 얼굴로 나를 보셨다.

"이러면 진짜 낫는거야?"

"그럼요. 이게 멍든 데 얼마나 좋다구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너 되게 똑똑하구나."

똑똑하다는 칭찬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았다.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다. 애기씨께서 비밀 얘기하듯 얼굴을 내 앞에 바짝 들이대셨다.

"너 글자 읽을 줄 알지? 시는 지을 줄 알아?"

"네?"

전혀 뜻밖의 질문이었다.

"종놈이 어떻게 글자를 알아요. 애기씨, 전 까막눈이에요."

"똑똑한 놈이 글자는 왜 몰라? 나무도 잘 타고, 각시붓꽃도 알면서."

"종놈은 글자를 배울 일도 없고, 배워도 써먹을 데가 없잖아요."

"써먹을 일이 왜 없어? 배우면 다 생기지. 근데 천출이도 배우는 글자를 네가 안 배웠단 말야?"

"걔는 대감마님께서 가르쳐 주시잖아요."

먼저 천출이 얘기를 하시고도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싫으신 모양이었다. 애기씨께서는 얼굴을 잠깐 찌푸리셨다가 금방 펴시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시며 내게 다시 소곤거리셨다.

"너 나랑 글공부 놀이 하자. 내가 가르치고 너는 배우는 걸로."

안 한다고 하면 애기씨께서 마님께 나무에 올라갔던 일을 고하시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하겠다고 했다. 애기씨께서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손수 물을 한 그릇 떠 오셔서는 날 데리고 동쪽 담으로 가셨다. 동쪽 담에서 까치발을 들면 사당 처마 아래쪽이 간신히 보였다. 거기엔 화려하게 채색된 나무로 만든 닭대가리가 붙어 있었다. 애기씨께서는 그 닭대가리에 대고 새벽마다 마님께서 정화수 떠 놓고 하시는 것처럼 절을 하셨다.

"너도 절 해. 글공부하기 전엔 여기서 절 하는 거야."

"저 닭대가리가 뭐라고 절을 해요? 고사 때 돼지머리에다 절하는 것두 아니고."

'저런 무식한 놈'하는 표정이 애기씨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닭 아니고 봉황이야, 봉황! 봉황이 자손들 벼슬자리 잘 나가게 해 준대서 사당에 봉황 조각하고 봉황 먹으라고 사당 뒷마당에 대숲도 만든 거야."

사람 가지고 인형 놀이하나, 뭔 글공부 놀이 하나 하는데 별짓 다 한다 싶으면서도 애기씨 얼굴이 어떤 확신 같은 것으로 꽉 차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나도 애기씨를 따라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봉황대가리에 절을 했다.

애기씨께서는 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방에는 필기구와 회초리 용도로 쓰일 나뭇가지까지 있었다. 애기씨께서는 대감마님마냥 양반다리를 하고 꼿꼿이 앉으셨다. 그동안 애기씨는 마님만 닮으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대감마님도 조금 닮으신 것 같았다.

"애기씨, 또 천출이네 다녀오셨어요?"

애기씨께서 회초리로 방바닥을 내리치셨다. 천출이는 분년이 아줌마 아들이었다. 뒷간에서 태어났대서 이름이 분년이었던 이 집 종 분년이 아줌마가 대감마님 눈에 들어 아들을 낳았고, 아들을 간절히 바라셨던 대감마님께선 그 애를 끔찍이 아끼셔서 분년이 아줌마를 첩으로 삼기까지 하셨다. 대 이을 아들을 낳으시려고 기자노리개까지 늘 차고 다니시는데도 딸만 셋 낳으신 안방마님께서 분년이 아줌마를 미워하신 건 당연했고, 머슴과 여종들도 자기네들과 같은 신세였던 분년이 아줌마가 첩이 되어 손에 물 안 묻히고 사는 걸 시기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와 헤어져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 이 집에 교전비로 따라 와서는 마님과 큰 언니 막내 동생처럼 지내온 어머니도 마님이 미워하시는 천출이네를 같이 미워했다. 마님의 따님이신 애기씨도 자기 어머니가 미워하시는 분년이 아줌마를 미워했다. 툭 하면 천출이네에 가서 욕을 해대셨다. 아니, 애기씨께서 미워하시는 건 분년이 아줌마보다는 천출이었다. 대감마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 있지만 천한 어미 출신이라고 해서 대감마님과 분년이 아줌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천출이'라고 불리는 그 애는 대감마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대감마님께 글을 배웠다. 위에 딸만 둘이니 셋째는 아들일 거란 기대를 깨고 딸로 태어나셔서 대감마님께 따뜻한 눈길 한 번 못 받고 안방마님께 글자를 떼신 애기씨는 대감마님께 글을 배우는 천출이를 대놓고 미워하셨다. 아마 오늘도 천출이는 사랑채에서 글을 배웠고 애기씨는 천출이네 가셔서 분풀이를 하셨을 것이다.

"분년아! 똥년아! 종년아!"

애기씨께서 천출이네 가셔서 집안사람들이 천출이네 욕하는 말들을 주워들으신대로 외치시면 주눅이 잔뜩 든 분년이 아줌마가 주볏주볏 나와서 굽신거렸다. 대감마님께서 얼마전 새로 얻으신 기생첩에 밀려나서 더욱 움츠러든 분년이 아줌마를 흘겨보시던 애기씨는 "노리개첩년!"하고 쐐기를 박으셔서 분년이 아줌마를 움찔하게 하곤 하셨다. 그리고는 천출이를 불러내셔서 "천출 주제에!"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분년이 아줌마와 천출이의 기죽은 얼굴들이 불쌍해서 애기씨께서 천출이네한테 너무 심하시다고, 애기씨가 못되게 구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책을 펴다 놓고 대감마님 흉내를 내고 계시는 애기씨를 보니 애기씨도 어딘지 불쌍해 보였다.

"애기씨, 죄송해요."

애기씨께서는 '회초리로 방바닥 친 걸로는 분이 풀릴 리 없지만 네가 죄송하다니까 참는 거다'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시다가 한마디 하셨다.

"제대로 공부 안 하면 종아리를 아프게 칠 거야.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애기씨께서는 붓을 들어 ㄱ, ㄴ, ㄷ 같은 언문 글자를 정성들여 쓰셨다. 먹물향이 방안에 퍼졌다. 고개 숙이고 글자를 쓰시는 애기씨 이마가 반듯했다. 흰종이에 먹물이 번지면서 '가'도 되고 '나'도 되었다. 그때 내 얼굴은 오동나무 위에서 한양시내를 보시던 애기씨 얼굴과 같았을까.

글공부 '놀이'래서 글공부 흉내만 낼 줄 알았는데 애기씨는 작정하시고 내게 언문 글자를 가르치셨다. 내가 먹을 갈아오면 애기씨께서 종이에 글자를 쓰시고 나는 그 종이를 소중히 품에 넣어 가져가서 산에 나무하러 가서나 행랑채 마당에서나 틈틈이 몰래 꺼내 보면서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 연습을 했다. 가끔 너무 바빠서 그날 배운 글자를 그날 익히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 다음날이면 애기씨는 회초리로 내 종아리 치는 시늉을 하셨다. 글자를 조금 알면서부터는 종놈이 글자 배워봤자 쓸 데가 없다는 내 말을 기억하셨는지 애기씨께서는 넓은 오동잎에 "마당 쓸어"같은 글을 적어서 내게 건네는 식으로 심부름을 시키셨다. 어느 날인가는 "네 이름자는 쓸 줄 알아야지"하시며 "박범"이란 글자를 써 주셨다. 처음 먹을 갈고 붓을 잡던 손의 느낌을, 땅바닥에 수십 번을 쓰고 지웠던 내 이름자를, 말소리가 아니라 글자만으로도 서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순간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할 것 같다.





== 가체 ==
2009/04/13 - 가체; 소개하기에 앞서
2009/04/14 - 가체; #1
2009/04/17 - 가체; #2 (You're here)
2009/04/20 - 가체; #3
2009/04/24 - 가체; #4
2009/04/28 - 가체; #5
2009/07/09 - 가체; #6
2009/07/10 - 가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