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ulius 2009. 4. 20. 21:55

언문을 깨친 후부터는 언문으로 된 책을 무엇이든 갖다 읽었다. 애기씨 방에 언문책이라고는 계녀서와 소설밖에 없어서 나는 부녀자의 도리를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내가 부녀자의 도리에 관해 쓴 책들을 읽는 동안 애기씨는 <박씨부인전>이나 <홍계월전> 같은 소설책을 읽으셨다. 어떤 때는 책을 밀어두시고 오동나무 위에 올라가 한양 시내를 한참 보시다가 내려오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서 책을 읽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내려왔더니 집안이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듯 어수선했다. 안채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여자의 비명소리와 곤장으로 살을 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서워서 어머니를 찾았더니 어머니는 문 밖에서 애기씨를 품에 안고 다독이고 있었다. 날 돌아보시는 애기씨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주인 눈치 살피고 사는 머슴 처지 덕에 눈치가 빠른 나는 그 눈물이 슬퍼서가 아니라 억울하고 분해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머니가 나를 끌어당겼지만 나는 애기씨와 어머니를 따라 행랑채로 가지 않고 그 무섭고 끔찍한 소리가 그칠 때까지 안채 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마 후에 석정인 돌쇠아저씨가 한쪽 어깨에는 피투성이가 된 분년이 아줌마를, 한쪽 어깨에는 곤장을 메고 나왔다. 아저씨의 얼굴은 얼만큼은 슬프고, 얼만큼은 서럽고, 얼만큼은 피곤하고, 얼만큼은 힘들어 보였다. 분년이 아줌마는 기절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애기씨께서 분년이 아줌마에게 "종년아! 노리개 첩년아!"하시던 게 떠올랐다. 아무리 첩이고, 아들을 낳았더라도 종년은 종년이었다. 맞아죽어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종년. 나는 행랑채로 달려 갔다.

"분년이 아줌마 왜 맞았어요? 뭘 했길래 저렇게 많이 맞아요?"

"분년이만 맞았니? 나는 안 맞았어? 나는 안 맞았냐구!"

애기씨께서 서러우셨는지 그쳤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시며 치마를 걷어 올리셨다. 종아리에 시뻘건 회초리 자국이 선명했다.

"애기씨하고 분년이 아줌마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난 잘못한 거 없어! 잘못은 천출이가 먼저 했어! 천출이가 지 에미 잡은 거란 말야!"

"범이야, 넌 입 다물어. 애기씨, 쇤네는 애기씨 잘못 없는 거 알아요. 우리 착하신 애기씨는 잘못 없어요. 다 천출이 잘못이지."

언제나 안방마님 편인 어머니는 애기씨가 어머니 딸인 양 애기씨를 품에 안고 달랬다. 애기씨께서 기분을 푸시고 안채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는 내게 낮에 일어났던 일을 얘기했다. 애기씨는 낮에 또 천출이네 가셨댔다. 평소에는 애기씨께서 뭐라고 하셔도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천출이가 오늘은 애기씨께 뭐라고 말대답을 했댔다. 뭐라고 했는지 그 말을 들으신 애기씨는 분을 못 이겨 천출이와 분년이 아줌마 뺨을 후려치셨다. 그러고서는 곧바로 사랑채로 달려 들어가 대감마님께 뭐라고 아뢰었고 처음에 황당해 하시던 대감마님께서는 곧 노하셔서 애기씨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치셨다. 애기씨께서 물러가신 후 천출이가 사랑채로 불려갔다.

"천출이가 지 분수도 모르고 날뛰었나 보더라. 분년이가 저렇게 된 것도 애기씨께서 혼나신 것도 다 천출이 탓이지. 천출이가 지 에미 잡은 거라는 애기씨 말씀도 틀린 건 아닌 게지."

대감마님께서는 천출이를 마당에 세워 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태학의 식당에서 적서의 차별 없이 나이대로 앉게 함은 조정에서는 재주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허나 학교는 학교고 집안은 집안이다. 집안에는 집안의 법도가 있는 법이다."

그렇잖아도 친척에게 양자를 들이지 않고 천출이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시려는 대감마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계시던 안방마님께서는 이 기회에 자식 잘못 가르쳐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분년이 아줌마를 그렇게 호되게 치셨던 것이다.

다음날 애기씨께 갔더니 애기씨는 "왜 왔어? 천출이한테나 가지"라고 적힌 오동잎을 내밀고 등을 돌려 버리셨다. "소인은 애기씨 편이에요"라고 뒷면에 적어 돌려드렸더니 그제서야 날 마주보고 앉으셨다. 내게 내미신 손에는 마님의 비녀가 쥐어져 있었다.

"네가 내 편이면, 이 비녀로 몰래 사서삼경 책 좀 사 와."

"마님 비녀를 왜 애기씨께서 가지고 계세요?"

"어머니께서 나 시집갈 때 주신다고 했던 거니까 내 거야."

"그럼 시집가시기 전까진 애기씨 거 아니잖아요."

"난 시집 안 가. 안 갈 거야. 그러니까 이 비녀는 지금 써도 돼. 너 혹시 우리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이러는 거야? 그런 거면 걱정하지 마. 혼은 내가 날 테니까."

"애기씨, 책을 보고 싶으시면 사랑에서 갖다 보시면 되잖아요."

애기씨는 울컥 하셨는지 눈물을 글썽이시다가 가까스로 진정하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는 계집애라고 글을 안 가르쳐 주신다잖아. 부인의 행실은 조용하고 온화하고 혁혁하게 착하게 하여 이름이 바깥 사람들에게 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속에서 이른바 재능있다는 부인은 반드시 밖의 일에 간여하는 폐단이 있다시면서. 부인은 조석공궤와 접빈의 예절이면 족하다셔."

그게 부녀자의 도리였다. 마님도 그렇게 사셨다. 계집이 글을 알면 팔자가 험하다고들 했고 글을 잘 하더라도 남이 알지 못 하게 해야 하는 게 미덕이라고들 했다.

"애기씨, 그런 책들은 사서 뭐 하시게요?"

"공맹의 글을 읽고, 나면 장수 되고 들면 정승 되어 옥궐에 조회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청운의 꿈을 펼치려 하는데."

"부녀자는 밖의 일에 관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가셔서 벼슬까지 하시겠다고요? 애기씨, 부녀자의 벼슬은 지아비와 아들을 잘 보필하여 정부인 칭호를 받는 거에요."

"홍계월은 장수가 되어 용맹을 떨쳤잖아."

아마도 애기씨께서는 홍계월이 남편보다 뛰어났고, 시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장군 벼슬을 받고,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은 남편의 애첩의 목을 베어 버리고, 원수를 점점이 깎아 죽일 정도로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았다던 <홍계월전>의 내용에 끌리셨던 것 같다. 애기씨의 어머님은 기생첩도 마음껏 짓는 한시도 드러내고 짓지 못하셨고, 아들을 못 낳아서 시부모님께 주눅 든 며느리였고, 첩의 목을 베기는 커녕 투기하지 않는 부덕을 보이셔야만 했다. 분년이 아줌마를 그렇게 패실 때도 마님께서는 "자식 잘못 가르친 책임을 묻는다"고만 하셔야 했다.

"<홍계월전>은 소설이잖아요."

"<홍길동전>도 처음엔 소설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천출이가 벼슬하겠다고 나대는 세상이 왔잖아."

"그래서 천출이 뺨을 후려치신 거예요?"

"천출이가 그랬어. 대감마님께서,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께서 상소를 올리셨다고. '하늘이 인재를 탄생시킴에 있어서는 존비를 구별하지 않고, 백성의 충성을 바치기를 원함에 있어서는 귀천이 없다'고 하셨대. 그래서 내가 천출이는 학문도 하고 벼슬도 할 수 있다면서 나는 왜 안 되냐고 했더니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편협하고 바탕이 유약하니 성인이 될 수 없고 부인이 명철하면 나라를 망치니까 안 된대. 하늘이 존비는 구분치 않고 남녀는 구분하셨겠어? 사람의 날 때 성품이야 다 같은 거지."

"하늘은 존비를 구분하고 남녀도 구분해요. 애기씨 말씀 대로면, 천민 성품이나 양반 성품이나 천성은 다 같은 거에요? 인재에 존비가 없다는 건 양반하고 양반 아들인 서얼까지만이지, 안 그럼 머슴도 인재가 될 수 있게요? 남녀도 마찬가지예요."

애기씨는 잠깐 발끈하셨지만 내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셨는지 고개를 외로 틀고 날 보며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대로 부인도, 머슴도 똑똑하면 벼슬할 수 있어."

"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났는데 똑똑하다고 그게 돼요?" 언젠가 어머니가 그러셨다. 셋째 애기씨께서 태어나시고 몇 달 뒤에 내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나와 셋째 애기씨를 맞바꾸고 싶었다고. 마님께서는 딸을 낳고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셨고, 어머니는 딸을 바랐으니까 맞바꿀 수 있다면 맞바꿔 드리고 싶었다고. 만약 그 때 정말로 내가 마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나는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나중엔 과거급제도 하고, 그럴 수 있었을까.

비녀를 판 돈으로 책을 사서 나뭇단 속에 숨겨 와서 애기씨께 드리니 애기씨께서 심부름값이라며 책 한 권을 내게 미셨다. 산에 가서 펼쳐 보았더니 언문으로 한자의 소리와 뜻을 적은 천자문이었다. 한자는 대감마님께서 쓰시는 글자였다. 언문과는 또 다른 글자였다. '하늘 천'이라고 중얼거리며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한자를 써 보았다. 마치 금줄을 몰래 넘어가는 것처럼 무섭고 떨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림처럼 생긴 한자를 계속 땅바닥에 쓰고 지우고 다시 썼다. 갑자기 글공부하기 전엔 사당 지붕 밑의 닭, 아니 봉황 대가리에 절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나뭇단도 팽개치고 담 밑으로 갔더니 애기씨께서 마침 담 밑에 계시다가 날 보시자마자 "어딜 다녀오는 거야!"하고 소리를 치셨다. 산에 다녀오는 거 뻔히 아시면서 소리를 치시니 당황스러워서 멀거니 애기씨만 보고 있으려니까 애기씨께서 나더러 담 밑에 엎드리라 하셨다. 애기씨께서는 엎드린 내 등을 밟고 올라가셨다.

"설마 담 넘어서 사당에 들어가시게요?"

"책 숨겨놔야 해. 사당은 아버지만 아침 저녁으로 다니시니까 그때만 피하면 책 숨겨 놓고 읽기 좋을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동나무에 올라다니시는 것부터 마님 비녀 훔친 것까지 마님께 걸리면 호되게 혼날 일만 저지르셨는데 이번에는 사당에 들어가신단다.

"일어날게요. 사당엔 남자후손만 들어갈 수 있잖아요."

"나도 이 집안 자손이야."

애기씨는 기어이 담을 넘으셨다. 담 너머로 던져두신 책 보따리를 사당에 숨겨 두시고서 애기씨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어 보이셨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발받침용 돌을 담 밑에 갖다 두었다.




== 가체 ==
2009/04/13 - 가체; 소개하기에 앞서
2009/04/14 - 가체; #1
2009/04/17 - 가체; #2
2009/04/20 - 가체; #3 (You're here)
2009/04/24 - 가체; #4
2009/04/28 - 가체; #5
2009/07/09 - 가체; #6

2009/07/10 - 가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