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ulius 2009. 4. 28. 19:53
그 다음 날에는 원앙금침을 넣을 농을 만들려고 안채의 오동나무를 베었다. 오동나무를 베려고 초노 한 명이 갔을 때 서운이는 오동나무에 올라가 내려오려 하지 않고 있었다. 마님께서 짐짓 서운이 신경쓰지 말고 나무를 베라고 했을 때야 서운이가 나무 위에서 입을 열었다.

"전 시집 안 가요. 혼담 도로 물리라고 해요. 전 어머니처럼 살기 싫어요."

마님 얼굴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지나갔다. 하지만 말투는 흔들림 없이 엄했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네가 어린애더냐? 아랫것들 있는 데서 부끄럽지 않느냐?"

"저 진짜로 시집 안 가요. 어머니처럼 첩한테까지 부덕 보이는 척해야 하고 마음대로 외가도 못 가고 종일 집안 관리하고 손님 맞이하고 제사음식 만들면서 밤에도 책 한 번 마음대로 못 읽고 바느질하면서 이 집안 속에서 집안만 위하면서 그렇게 신산하게는 살기 싫어요."

어머니가 딸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마님은 한참을 묵묵히 서 계시더니 아기를 안아주듯 두 팔을 서운이를 향해 벌리시고 서운이에게 내려오라 하셨다. 서운이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내려가 마님 품에 안겼다.

"서운아, 너는 이 에미처럼은 안 살겠지. 우리 서운이는 아들 셋 낳고 서방님 사랑 시부모님 사랑 받고 네 서방이랑 같이 시도 짓고 아들들 잘 가르쳐서 지아비와 자식이 나란히 관직에 나아가 정부인 칭호 받고 잘 살 거야."

"어머니, 저는 제가 관직에 나아갈 거예요."

그때 서운이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확고했다. 마님은 바람부는 날 대숲처럼 흔들리셨다.

"네가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꾸미는 것보다 책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가 왜 딸로 태어났는고."

마님께선 서운이가 비녀 팔아 책 산 걸 알고 계셨던 걸까.

"어머니, 전 시집 안 가요."

"그건 안 된다. 혼인은 가문끼리 하는 거고 이 혼인은 네 아버지와 한씨 가문을 보고 하는 거야. 네가 시집가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란다."

"시집가서 사는 건 제가 사는 거잖아요! 저더러는 딸이라고 사당에 향불 한 번 못 피우게 하는 가문이 시집가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서운아, 이미 궁합까지 다 보고 날을 다 잡았어. 자꾸 왜 이러니."

오동나무 허리에 도끼날이 박혔다. 나무가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서운이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아랫입술을 꽉 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무가 소목장이에게 간 후 마당에는 오동잎과 잔가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괜찮아. 과거 급제하면 나무에 올라가지 않아도 도성 안을 다 돌아다니면서 볼 수 있어."

"그게 될까……."

서운이는 잔가지 하나를 주워서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겉으로는 큰소리 치면서도 서운이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알고 있었나보다. 부녀자가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을 뿐더러 혹시 급제하더라도 벼슬을 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과거가 하도 자주 시행되어 급제자도 그만큼 차고 넘치는 세상이었다. 누렁이를 '황진사'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그 차고 넘치는 급제자 중 관직에 나가는 사람은 가문이 좋거나 당파가 좋거나 하여간 끌어당겨주는 연줄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녀자인 서운이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내 인생인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양반 사내들도 과거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긴 하잖아."

그 후로 한동안 서운이는 사당에 오지 않고 안채에서 혼수품 바느질만 계속 했다. 나 혼자서 사당에서 책을 읽었지만 어쩐지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주위를 둘러보게 되고 마음이 불안했다. 밤이면 종종 악몽을 꾸었다. 의관을 갖춘 양반 노인이 내 한문책을 갈기갈기 찢거나 사당담이 갑자기 높아져서 꼼짝없이 사당에 갇히거나 손발이 묶인 채 책으로 입이 틀어막혀 버둥대는 꿈 등이었다. 서운이가 없으면 혼자서는 책을 읽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나날이 배가 불러오는 어머니는 밤늦도록 서운이 시집갈 때 가져갈 옷을 짓고 수를 놓았다. 어머니는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면서 베갯모에 목숨 수(壽)를 수놓고 있었다. 두루주머니에는 고양이와 나비가 수놓아져 있었다. <예기>에 나이 일흔은 모, 여든은 질이라 했고 대국말로 고양이 묘는 모와, 나비 접은 질과 발음이 같아서 고양이와 나비는 장수를 뜻했다. 어머니는 서운이가 자기가 쓸 가위집이며 수저집에 수탉과 맨드라미를 수놓은 것을 보고 "이건 서방님께나 수놓아 드리는 건데"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수탉의 벼슬을 계관(鷄冠)이라 하고 관(冠)자가 관직 관(官)과 음이 같아서 수탉은 관직을 뜻했다. 맨드라미는 닭벼슬을 닮았다 하여 계관화(鷄冠花)라고 했으니까 역시 벼슬을 의미했다. 그러고 보니 봉황이 닭 비슷하게 생긴 것도 닭이 벼슬자리를 뜻하기 때문인 듯도 했다. 휴우-. 자수에서 한자를 떠올리는 내 꼴에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지 분수껏 살아야지. 내 한숨은 서운이의 중얼거림과 같은 무게였다.

오동나무가 베어진 후로 늘 얼굴이 어두운 서운이를 어떻게 해서든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어머니는 짓고 있는 혼례복을 서운이에게 미리 입혀 보기도 하고 활옷 소매의 모란 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 애기씨 곱기도 하셔라. 이거 입고 시집가시면 딱 선녀 같으시겠네요. 요기 보세요. 여기다는 부귀영화 누리고 사시라구 모란수를 놓았구요, 요기다는 자손 번창하라고 석류수를 놓을 거구요, 그리고 꽃하고 새도 수놓을 거예요. 꽃하고 새는 부부간의 금실을 뜻하니까요."

"침모, 그냥 대충 놔. 어차피 다 소용 없어. 어머니 혼례복에도 석류며 화조자수가 있었고 베개엔 원앙도 있었는걸. 어머니가 어젯밤에 나한테 삼작노리개며 가락지며 다 보여주시면서 그러시더라구. 예전에 아버지 지방관직 가실 때 '귀한 패물을 드리니 이걸 지니고 다시 돌아오세요'하는 뜻으로 가락지 채워 드렸더니 아버지는 그걸 기생한테 정표로 주셨다고. 그때 그 가락지 나 주셨으면 내가 잘 썼을텐데. 그러니까 침모, 무슨 의미, 상징 이런 거 다 헛거야."

서운이는 그러고서 날 보며 깔깔 웃었다. 가락지도 서운이 손에 들어갔으면 책값으로 쓰였겠지. 나는 서운이가 수탉과 맨드라미를 수놓았던 게 생각났다.

"아이고, 애기씨, 아직 나이도 어린 애기씨가 생각은 왜 이렇게 인생 다 산 아낙네 같으시네요. 애기씨, 시집가서 잘 사시는 부인네도 많아요."

"침모, 나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은 거야. 시부모 공경하고 아들 낳아 기르고 남편 내조하고 이런 거엔 별로 흥미 없어. 그런 것들보다는 글 읽는 게 더 좋고 글을 읽으면 그걸 현실세계에 적용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져. 공자님 제자 자로도 그랬다구.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의를 구현할 방법이 없다고. 아마 서얼들이 벼슬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래서겠지."





== 가체 ==
2009/04/13 - 가체; 소개하기에 앞서
2009/04/14 - 가체; #1
2009/04/17 - 가체; #2
2009/04/20 - 가체; #3
2009/04/24 - 가체; #4
2009/04/28 - 가체; #5 (You're here)
2009/07/09 - 가체; #6
2009/07/10 - 가체;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