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별 되기/짧은 생각

나는 왜 덕수궁에 갔는가

iulius 2009. 5. 28. 16:37

오늘(25일 월요일) 아침, 집에서 일찍 나와 덕수궁으로 향했습니다. 평소에 안 타던 지하철을 탔더니 나름대로 일찍 나온다고 나온 건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놀랬죠. 시청역에서 내려 대충 안내도를 보고 2번 출구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1번 출구로 나가는 것이 더 빠르더군요;; 2번 출구 지하에서부터 벽면을 가득 메운 A4용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부터 이명박을 욕하는 글까지 수많은 종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심경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2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대한문 앞에 걸린 대형 태극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돌리자 차도와 인도를 가르고 있는 경찰버스들이 보였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겠다고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가 폭력집회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기하고 있는 경찰버스라. 이 정부처럼 자신감 없는 정부는 간만에 만나보는 것 같습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분향소 앞에는 5~60명의 시민들이 분향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분향소로 발걸음을 옮겼죠. 헌화할 꽃을 받아들자 한 분이 제 왼편 가슴에 검은색 '謹弔' 리본을 달아주었습니다. 줄을 서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마이크를 대고 물어보더군요

"혹시 회사원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그럼 출근하는 길에 분향하러 오신건가요?"

"네"

"어떤 생각으로 아침에 오시게 되었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마이크에 MBC 로고가 보였습니다. 사실 그 순간 무척 당황했습니다. 내가 왜 여길 왔지? 봉화마을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가볼 사정이 안 되니까 서울에서라도 분향해야겠다고 생각했던거지. 그럼 왜 봉화마을을 가보고 싶었을까.

인터뷰는 솔직히 엉망이었습니다. 아마 TV에 나오는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정도 의도된대로 "주말에 분향을 못해 '출근길'에 들러서 분향을 하려고 일찍 나왔다"고 대답했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시대를 앞서간 감은 있지만 우리가 일찍이 가졌던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라는 판에 박힌 대답을 하고 말았으니까요. 아마 저는 전직 국가원수의 비극적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일반 시민도, 바쁜 출근길에서라도 반드시 분향을 하고 가고 싶어했던 평범한 회사원도 아닌, 정해진 답을 읽고 있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에 딱 좋았습니다.

분향을 마치고 다시 지하철을 타는데 만약 나한테 충분히 시간이 주어졌다면 인터뷰에 어떻게 답을 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나는 왜 분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까.

2002년 대선날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노무현-정몽준 연대가 이루어진 덕에 이회창 후보를 누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친구들과 '이번 대선은 허경영이 안 나오니 불심으로 대동단결에 한 표다'라고  얘기하고 있었죠. 그러나 그 날 밤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고, 정몽준의 지지 철회가 더 센지 국민의 힘이 더 센지를 보여주겠다며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밤 늦게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주문하는데 안쪽 TV에서 개표방송을 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되었느냐고 주인 아주머니한테 물어보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됐다고, 이겼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노무현이 당선되었느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을 뿐인데 말이죠. 아마 당연히 모든 대학생들은 노무현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노무현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였는지도 모르지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고 나서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단어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대통령은 말하자면 왠지 익숙했었거든요.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대통령은 이미 민주화 투사로 유명한 분들이었고, 그 전 대통령들은 독재의 상징처럼 불러왔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자체가 익숙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란 말은 마치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권력 앞에 굴복하고 비겁해야 했다고 지난 6백년 역사의 비민주성을 질타할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믿기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그 때부터 5년간, 저는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였습니다. 탄핵 정국 때에도, 조중동과 싸울 때에도, 미군 기지 이전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때에도, 이라크 파병 논의 때에도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 대통령 못 해먹겠다던 발언, 종부세를 신설하며 강남 땅부자와의 전쟁 선언 때에도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정책이 한미FTA였죠.

처음부터 노무현 지지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2002년 여름까지만 해도 노무현이 누구인지 잘 몰랐죠. 어찌보면 대선 때에도 노무현을 지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항마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이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지지자로 바뀌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이라고 하면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노무현은 유시민, 정동영보다는 박정희와 훨씬 가까운 성향의 인물입니다. 박정희의 18년 독재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은(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 박정희의 국가 발전을 위한 소신과 헌신, 그리고 굽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가는 추진력과 지도력을 꼽습니다. 강한 지도자, 그것이 박정희의 상징이자 그의 업적의 밑거름이죠.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충분히 강한 지도자이죠.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가장 비슷할 수 밖에 없는 점은 두 사람 모두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노무현은 "권력에 비굴하지 않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정정당당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박정희는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독재를 했습니다. 그의 소신이 강했던 만큼 그가 국민을 대하는 방식도 강했죠. 노무현 대통령은 정정당당한 민주사회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의 소신이 강했던 만큼 그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리더쉽 없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노무현 대통령은 계파가 없었습니다. 계파가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계파가 있으면 자신의 식구를 더 챙기게 되고 자신의 파벌을 더 챙기게 됩니다. 한 쪽을 챙겨주기 위해서는 다른 쪽을 버려야 되고 버려진 다른 쪽이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자기 쪽에 확실한 권력을 쥐어줘야 합니다. 계파정치를 하게되면 필연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의 단기 독재 형식의 통치가 이어지는 거죠. 마치 준최적화의 오류와도 같다고 할까요. 선택을 받은 집단에서는 최적화가 이루어지지만 전체 집단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한 국민 전체를 염두에 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에 조중동까지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그의 대연정 발언이나 한미FTA 등은 그 스스로가 가졌던 소신이 특정 집단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권 말기에 그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곤두박칠치고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안 배운 사람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가리지 않고 노무현의 실정과 그의 리더쉽 부재를 비판했을 때에도, 저는 최소한 이 사람은 50년 후의 역사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은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하신 말을 기억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개혁이 필수적이다. 지금과 같은 정치체제로는 결코 더 잘 사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퇴임 이후 뇌물 스캔들이 불거지고 검찰과 언론이 생중계하듯 이와 관련된 일들을 보도했을 때, 제가 보는 노무현 대통령은 안쓰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뻔뻔해도 될텐데. 남들은 그 큰 죄를 저지르고도 고개 들고 뻔뻔하게(자기들의 표현으로는 꿋꿋하게) 살고 있는데. 차라리 독재를 하시지. 도덕적 청렴만큼은 자부심이 높았기 때문에 그 도덕성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구요. (죽지도 않았던)경제만큼은 살리겠다고 당선된 사람이 경제는 다 죽여놓고도 뻔뻔하게 국민들에게 의식구조를 바꾸라고 훈계하고 있는 건 안 보이셨나요.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곧잘 대통령 못 해먹겠다 힘들다는 표현을 하셨고 그만큼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우리가 진짜 대통령을 뽑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통령,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요즘 사회에서 휴일도 없이 전국 5천만 모든 사람을 건사하겠다고 노력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일일이 그 모든 사람을 챙길 수 없으니 조직과 제도를 통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통솔하면서 국가의 비전까지 계획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지금 나 하나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우리나라를 시야에 넣고 있어야 하는 가시방석입니다. 예전에 보면 훌륭한 임금들은 보통 단명했죠. 격무에 시달려서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통령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그 권력을 누리고 싶은 사람 아니면 정말 자신을 버릴 각오가 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 힘들다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면 그건 초인이겠죠. 아마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은 박정희와 노무현 두 명 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정희는 독재를 통해 자기가 받을 스트레스를 줄이고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나간 반면 노무현은 그 스트레스에 그냥 노출되었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만 다르죠. (물론 그런 점에서는 박정희가 좀 더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길이 자기자신에게는 가시밭길이 될 지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 이 나라가 자기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이 나라에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던 사람. 새로운 시대에 권위는 필요하지만 권위주의는 없어야 한다며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도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 스스로가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았던 사람.

그 사람이 우리가 7년 전 뽑은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덕수궁에 갔습니다. 말로만 지지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날이 아쉬워서, 이렇게 그를 떠나보내기가 아쉬워서, 영정 앞에서 절을 드리면 그 분도 제 인사를 받아줄 것 같아서요.

이것이 사실 오늘 인터뷰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는 너무 당황해서 판에 박은 대답밖에는 못했지만. 그래서 저는 덕수궁에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