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별 되기/짧은 생각

방공식별구역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보며

iulius 2013. 12. 2. 03:18

요즘 들어 네이버 댓글을 너무 열심히 읽는 것 같다. '댓글의 95% 쓰레기'라는 평소의 신념에는 전혀 변화가 없지만, 뭐랄까, 댓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 멍청이들을 끌어안고 가는 민주주의'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해서도 된다는 생각에 확신이 더해지는 것이 재미있어서랄까. 어떻게 보면 대의민주주의라는 멋들어진 말은 나를 포함한 멍청이들에게 던져주는 일종의 미끼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치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정치학에 대해 알고 있지도 못하므로 용어를 잘못 사용할 있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나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이나 방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정치 논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정치가나 정치꾼이나 행동이 정치 논리에 따르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정치가의 특정 목적은 최소한 자신이 진실로 옳다고/필요하다고 믿는 것임에 반해서 정치꾼의 특정 목적은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정치꾼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특정 목적은 개인의 이득이다.[각주:1] 정치꾼의 행태는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오고 정치에 대한 혐오는 정치가보다는 정치꾼이 득세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이제 정계에는 정치꾼만이 남아 있는 같다요즘 시끌시끌한 이슈인 방공식별구역에 대한 댓글과 정부의 대책을 보면, 입법부 뿐만 아니라 행정부마저도 이미 정치꾼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키보드 워리어'라고 불리우는 댓글러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익명성의 뒤에 숨어서 감당할 수 없는 주장을 손쉽게 하는 것이다. 이번 사례에서는 '이제 더 이상 굴욕적으로 있지 말자' 정도로 요약되는 주장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듣기에는 속 시원할 지 몰라도 전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사태를 악화시키기에 딱 좋은 주장들이 즐비한 네이버 댓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평소 내 신념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 방공식별구역의 문제는 영토 문제보다도 더 복잡해질 수 있는 문제이다. 독도를 예로 들어보자.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면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이를 수용하려고 했다간 헌법에 근거해서 대통령 탄핵도 가능한 상황이니 국지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일본이 자신의 방공식별구역에 독도를 포함한다면, 애매하다. 국민 감정은 점령당했을 때와 마찬가지이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선이라 우리가 지킬 의무가 없으니 우리는 통보를 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독도 상공을 지나는 다른나라 항공기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 비행계획을 통보하기 시작하면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인접국가 간에 반드시 협의해서 선언해야 하는 선도 아니고 영공과 일치하는 개념도 아니니 논리적으로 일본을 압박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군사적으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토가 점령당했다면 군사력 차이고 뭐고 간에 어떻게든 되찾아 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겠지만, 그것도 아닌데 굳이 열세한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무리수를 쓸 이유도 없다. 만약 독도 상공에서 한일 공군간에 교전이 벌어져도 이제는 일본의 침략이 아니라 방공식별구역 중첩에 의한 우발적 교전 정도로 인식될 것이다. 일본에 통보하지 않고 독도를 비행하자니 군사력이 열세고, 그렇다고 통보하고 비행하자니 여론이 부담이고, 차라리 비행을 아예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편을 들 이유가 없다. 방공식별구역은 그런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재의 군사력으로 이어도를 당장 방공식별구역 내에 편입하자는 주장은 우리가 앞장서서 상황을 악화시키자는 주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국민의 대표인 입법부와 정무를 처리하는 행정부의 목표는 무엇일까. 만약, 정말로 국회와 정부의 목표가 우리 주권에 대한 사소한 침탈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군사력과 외교력의 강화 밖에 없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이 미국과 일본에게는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해양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한국에게는 '한국은 어떤 헤게모니를 따를 것인가'를 묻는 응수타진이라는 경향신문의 분석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대놓고 누구 하나를 적대할 수 없는 우리 입장에서, 나는 시간벌기가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대답할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운신의 폭을 넓혀 놓아야 우리의 응수가 가장 효과적일테니까. 그러나 입법부는 여전히 정부기관 대선개입 문제로 정신이 없고 행정부는 방공식별구역 확대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박근혜가 검토를 지시했다고 하니 아마도 조만간 확대된 방공식별구역이 발표될 것이다. 그곳을 지나는 항공기들이 우리에게 비행계획을 통보해 줄지 말지는 물음표이지만 그 발표를 들으면 많은 국민들이 속 시원해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높아질 것이다.


먼저 행정부의 행태를 보면 방공식별구역 확대를 선언하겠다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난 수십 년간 방공식별구역과 관련하여 정부가 손 놓고 나몰라라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30년 넘도록 미국에게 방공식별구역 조정을 요청했고, 최근 십년래에는 일본과 이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30년간 일본이 아닌 미국에게 조정을 요청했고, 40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 지금 당장의 우리 실력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못 하던 것을 갑자기 박근혜가 지시했다고 해서 할 수 있게 될리는 없다. 과거에 하지 못했던 이유는 현재도 유효할 것이다.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정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공식별구역 확대 선언의 목적이 실제로 이를 주변 국가가 받아들여서 방공식별구역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그냥 믿기는 석연치 않다. 과거와 차이 나는 점이라면 이어도 상공에서 작전 시간이 길어지도록 공중급유기를 도입하겠다는 것인데, 일단 도입 시기도 지금 당장이 아닐 뿐더러 공중급유기 도입으로 공군전력이 비등해진다고 볼 수도 없는 점을 고려하면, 공중급유기 도입이 정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 우매한 머리로는 행정부의 목적이 방공식별구역보다는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목적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이든, 정국경색 상황의 해소이든, 대선 불법개입 문제의 희석화이든 간에 정책의 목적이 누군가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행정부의 행태는 정치꾼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입법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생각 역시 변함은 없지만, 무엇보다도 과거 정부의 국방개혁을 좌초시킨 지금의 여당에 책임을 더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 이후 국방정책의 초점은 대북전략이었다. 처음에는 국가 생존의 문제였고 그 다음에는 정권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가상 적국과의 전쟁에서 피해 없는 완벽한 승리를 목표로 군사력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미국은 예외라고 보고...) 유독 우리나라만이 북한에 대해 그런 수준의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안타깝게도 구조적으로 우리는 절대 그런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것은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지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50%가 밀집해 있고 사회, 경제, 정치적 기반의 대부분이 몰려 있는 서울이 전선에서 고작 100 km 떨어져 있는 현실에서는 우리가 어떤 물리적 힘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부족하다고 계속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무리 받아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지킬 수 없다'는 우리 군의 주장을 들어왔다. 이 주장에 실질적인 힘이 실리는 이유는 그것이 정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5년간 익숙해졌던 일본의 지배보다는 8년간 경험한 극한의 좌우대립이 더 두려웠고, 그 두려움의 실체가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논리는 다른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공산주의 자체가 무너진 이후에도 이 논리는 종북논리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되고 있다. 북한만을 주적으로 보고 북한만을 상대하고자 하고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제시하는 것 모두가 지금 사회를 통제하고 있는 질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속적인 권력의 유지라고 하는 이득을 위해서.


문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치꾼 같은 행태에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가장 큰 원인이라면 앞서 얘기한 대로 생각 없는 멍청이들이 너무 많아졌고, 생각 있는 사람들이 정치에 혐오한 덕분에 그 멍청이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에서 국방목표를 재설정하면서 '말라카 해협에서 대한민국 영해에 이르는 해양수송선 확보'를 내걸었을 때 온갖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보수 세력이었다. 3척의 독도급 헬기모함(공식적으로는 수송함)을 기함으로 하는 3개 기동함대 창설에 제동을 건 것도 그들이었다. 이지스함 1척의 운용비가 26개 사단의 운용비와 맞먹는다며 도입을 반대한 것도, 미공군과 미해군이 지켜준다며 우리 하늘과 바다를 남에게 맡겨버린 것도, 우리는 여전히(라고 쓰고 '영원히'라고 읽는다) 우리 스스로 작전을 세우고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보수 세력이었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당연한 말을 무시하고 미국과 일본이 영원히 우리의 친구일 거라고 주장하는 것도 보수 세력이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북한에 의한 것이며 북한만 막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사람들이 믿어야만 그들의 권력 유지가 보다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대로 안 움직이는 미국, 중국, 일본에 비하면 툭하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북한은 얼마나 이용하기 편한 적인가. 그러니 북한 이외의 국제 관계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항상 뒷북을 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군사적 능력이 부족해서도,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라 아예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60년이 넘은 분단의 가장 큰 폐해는 '반공'과 '종북'이라는 이분법이 사회 전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지어 반드시 북한을 적대해야만 반공인 것도 아니고, 반드시 북한을 추종해야만 종북인 것도 아니다. 반공을 가장 높게 주장하는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합의하는 모든 주장은 반공이고 그에 대한 반대 주장은 종북이다. 그러니 이거나 저거나 같은 차원의 얘기 같지만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문제는 '이 나라를 북한으로부터 지켜낸 노년세대'의 복지문제였고, 영유아 무상보육이나 초등학생 무상급식 문제는 종북 좌파의 소란이었다. 이 덕에 우리 사회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수 많은 건설적인 주장과 논의들이 종북의 낙인 아래 배척당하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수 많은 병폐는 반공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버린다.


민주주의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와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나도 투표를 하지만 나는 내 표를 받는 후보자나 그 정당 자체를 믿지는 않는다. 그 후보자가 헌법에 따라 나를 대표할 수는 있지만, 그의 모든 의견이 나와 일치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공약이다. 공약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안에 대한 후보자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공약은 대표성을 부여하는 현실의 수단인 셈이다. 즉, 공약을 어기는 것은 이러한 전제조건에서 일탈하는 것과 같다. 공약이 지켜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나는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규칙에 대한 위반이다.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것, 지킬 수 없는 공약을 하는 것, 공약은 선거용이라고 말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누가 공약을 지키는 꼴을 본 적이 없는 우리 민주시민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표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도 나는 민주주의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1. 내 용어를 사용해서 현실의 한 가지 사례 – 대운하 사업 – 에 대입해 보면, 이명박을 비롯해 대운하 사업을 최초로 계획했던 사람들은 정치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대운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들이 대운하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거나 이름을 4대강 사업이라고 바꾸는 등으로 국민을 기만한 것은 정말 필요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을 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신념 없이 4대강 사업을 지지했던 국회의원은 정치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그 사업을 지지한 것은 개인의 이득을 지키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운하 사업의 계획 자체가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면 이와 관련해서는 정치꾼만 존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