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리율/여행기

이탈리아 여행(2013년 6월 1일 - 10일) #3: 아이러니(2일차)

iulius 2013. 6. 30. 00:30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에서는 국체(國體)를 건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1861년 사보이 공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국왕으로 즉위한 이래 85년 만에 다시 공화국으로의 복귀를 놓고 국민들의 의사를 물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서 1900년부터 재임하였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ttorio Emanuele III는 1922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로마 행군에 놀라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는데, 비록 1943년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체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그에게 정권을 맡기고 나치 독일을 도와 전쟁을 수행한 책임이 왕정 유지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46년 5월 9일에 왕위를 아들인 움베르토 2세Umberto II에게 넘겨주었으나 6월 2일의 투표에서 유권자의 54.3%가 공화정을 지지하였고 대법원이 6월 18일 최종적으로 투표 결과를 승인함에 따라 이탈리아는 다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남자는 모두 추방되어 2002년 10월까지 이탈리아로의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1946년의 국민투표 결과. 북부는 공화정을, 남부는 왕정을 지지하였다]

  





매년 6월 2일 로마에서는 공화정 복귀를 기념하여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립니다. 퍼레이드에는 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군대 뿐만이 아니라 경찰, 소방대 등 이탈리아 공화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공권력이 각자의 부대기를 앞세우고 참가합니다. 마치 모든 힘을 동원해서 공화국과 공화정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요.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부대는 팔라티노 언덕 앞의 성 그레고리 거리Via di San Gregorio에 집결하여 콜로세움Colosseum을 한 바퀴 돌아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Via dei Fori Imperiali를 따라 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 앞에 있는 조국의 제단까지 행진합니다. 보통 콜로세움은 오전 8시 30분에 개장하지만 이 퍼레이드 때문에 매년 6월 2일에는 오후 1시로 개장시간을 늦춥니다.




[공식적으로 퍼레이드는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에서 거행된다]






사전에 이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것이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린 첫 번째 아이러니였습니다. 여행 2일차,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오늘이 바로 6월 2일이었던 것입니다. 콜로세움 매표소의 줄이 길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가서 표를 사야 된다고 알고 있었던지라 급하게 아침을 먹고 7시 40분에 숙소를 나섰던 우리가 8시 30분이 되기 전에 콜로세움에 도착했을 때에는 매표소 앞의 기다란 줄 대신 수많은 경찰과 군인, 장갑차가 콜로세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구경꾼은 많았지만 콜로세움 앞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의 길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게 된 것은 콜로세움을 한 바퀴 돌고나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에 늘어선 퍼레이드 행렬을 보고 그 중 한 명에게 물어본 다음이었습니다.






[한산한 콜로세움 앞. 옆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보인다]






[퍼레이드 준비 중인 대열

上, 中은 콜로세움 쪽을 바라본 것, 下는 대경기장Circus Maximus 쪽을 바라본 것]






굉장히 큰 기념일이고 퍼레이드에는 대통령도 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제서야 왜 이 주변에 경찰과 군인이 이렇게 많았는지, 장갑차가 경비하고 있었는지, 헬기가 계속 떠 있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로마와 중세 기독교 유적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아침 일찍 달려 왔는데, 정작 2013년 현재에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첫 출발부터 꼬인 겁니다.군악대 병사는 보고 가면 기념이 될 것이라며 추천해 주었지만 우리나라 군사 퍼레이드도 안 보는 판에 남의 나라 군사 퍼레이드를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1시까지 기다려서 콜로세움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오늘은 포기하고 다른 날 다시 올 것인지부터 결정해야 했지요. 오늘 콜로세움을 볼 것인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에 앞서서 이 행렬을 보자고 결심했던 것은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경로를 알게 된 다음이었습니다.


퍼레이드는 콜로세움에서 출발하여 조국의 제단에서 끝납니다.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가 출발점과 도착점을 연결하는 길입니다. 라틴어인 포룸은 이탈리아어로는 포로foro, 영어로는 포럼forum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란 그 길이 지나는 자리에 로마 황제들이 시민을 위해 지어 기부한 포룸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거리를 조성한 사람은 다름아닌 무솔리니입니다. 히틀러를 초청한 무솔리니가 그 앞에서 히틀러는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고자 조국의 제단에서 콜로세움까지 일직선으로 퍼레이드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에서 공화정 복귀를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한다는 것, 그것도 그 거리의 조성자가 무솔리니라는 점은 오늘 만난 두 번째 아이러니였습니다.




[조국의 제단(右)에서 바라본 콜로세움]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이름은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이지만, 실제로 이 거리의 조성 목적이 오로지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한 군사 퍼레이드였던만큼 이 거리는 오히려 수많은 황제들의 포룸을 반토막 내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떻게 보면, 그 목적을 너무 잘 달성했기 때문에 공화국 이탈리아가 여전히 이 곳을 퍼레이드 장소로 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퍼레이드는 오전 10시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콜로세움을 돌아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로 접어들면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콜로세움 건너편 첼리오 언덕배기에서 그 행렬을 지켜보았습니다. 남의 나라의 군사 퍼레이드이니만큼 특별한 감흥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배경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늘은 너무 파랬고 웅장하게 서 있는 콜로세움은 마치 오려 붙인 것 같아서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행렬이 콜로세움을 모두 빠져나가는 동안, 처음 마주하는 로마의 하늘과 책에서만 보아왔던 유적지를 바라보며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콜로세움 앞을 지나는 행렬.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티투스 개선문이 멀리 보인다]




[아침. 콜로세움 앞 행진로를 경비하고 있는 경찰]






콜로세움에는 다른 날 다시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로마에는 오늘 말고도 3일을 더 머물 계획인데다가, 두 시간 넘게 더 기다리기도 힘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네치아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베네치아 광장은 황제들의 포룸의 거리의 다른 쪽 끝이자 로마 관광의 중심지입니다. 베네치아 광장 전면에 조국의 제단이 놓여져 있지요. 그러고 보니 퍼레이드의 출발점인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입니다. 퍼레이드의 종착점인 조국의 제단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지요. 멋진 배경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화정 복귀를 기념하는 퍼레이드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아, 그러고보니 아이러니컬한 오전의 마지막은 제가 장식했습니다. 애초에 이 퍼레이드를 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솔리니가 유적지를 반토막내면서까지 히틀러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던 군사 퍼레이드의 장관을 저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결심해 놓고선 제가 퍼레이드를 지켜 본 장소는 정작 그 반대쪽의 첼리노 언덕이었지요. 그 광경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료화면으로나 찾아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