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2013년 6월 1일 - 10일) #1: 떠나는 길에 (1일차)
[상하이 푸둥공항]
6월 1일 중국표준시 오전 11시. 로마 행 비행기는 12시 30분에 이륙할 예정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하이 푸둥공항의 면세점이나 환승 대기시설에는 특별할 게 없어서 그저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일 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어쨌든 남의 나라 공항에 앉아서 이렇게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실감이 나는군요.
2월 중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보통 2월이면 충분히 바빠졌을 뿐 아니라 한동안 바쁜 것이 좀 나아질 기미도 없을 시기입니다. 특히나 올해는 더욱 심해서 매일 새벽 3시 넘어 퇴근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요. 3일 연휴였던 설날의 앞 뒤로 하루씩, 이틀 동안 연차휴가를 강제로 사용하도록 할당되었지만 설 연휴에도 출근해서 일 하는 판국에 이틀을 더 쉬는 건 생각지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설날 다음날 출근해서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일 하면서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습니다. 휴가라도 잡아 두어야 그걸 바라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이런 저런 스케쥴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가장 빨리 휴가를 갈 수 있는 시기가 6월이었습니다. 6월까지는 세 달 하고도 2주일이나 더 기다려야 되는 때였습니다. 무작정 현충일 앞 3일간 휴가를 신청해 두고 나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6월이 오기는 올까 싶었지요. 6월이 되면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는 6월이 되어 쉴 수 있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인지 그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3일 휴가를 냈을 때부터 6월 7일은 징검다리 연휴로 강제 연차휴가를 사용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휴가는 6월 1일부터 9일간이었으니 시간이 한참 남아서 그렇지 그 때가 되면 충분히 길고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사나흘 간 어디 해외라도 나가서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이판이나 괌 같이 따뜻한 곳에 가서요.
2월말에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통상적으로 강제 연차사용일에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면, 별도의 승인절차 없이 다른 날에 대체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번 설 연휴의 강제 연차휴가에 대해서는 일괄적으로 3월 27,28일에 대체휴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월에도 그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승인을 얻고 대체휴가일을 조정해야 됐습니다. 갈 엄두도 못 내는 휴가를 쓰네 마네 하는 것이 씁쓸하더군요. 3월말에도 여전히 업무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6월 10일과 11일에 대체휴가를 신청하였습니다. 휴가기간은 이제 11일로 늘어났습니다. 11일이나 되는 휴가기간 동안 고작 사나흘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은 왠지 아쉬웠습니다. 조금 오래 다녀올 만한 곳은 어디가 있을까. 아예 하와이를 다녀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참에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던 유럽을 가 보는 것은 어떨까.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특별히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6년 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계획했을 당시에도 - 그 여행은 결국 계획 만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 이탈리아는 여행 막바지에 잠시 들러서 오는 경유지였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의 관심은 현재의 이탈리아가 아닌 과거의 이탈리아, 로마에 있었습니다. 과거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어떤 형태의 국가 중에서도 로마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합의를 법과 이성에 두었던 거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들의 법보다 더 유명한 로마의 군사력은 그 법과 이성에 따르는 - 로마식 표현으로는 문명화된 - 사회를 그렇지 않은 - 야만적인 - 사회로부터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그래서 첫 유럽 여행은 터키에서 출발하여 그리스, 유고, 오스트리아, 독일을 거쳐 영국까지 간 다음에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경유하여 돌아오는 두 달 짜리 '로마제국 국경선 탐방'으로 계획했었습니다. 이제 휴가를 내면 길어야 10일이니 그런 긴 여행은 계획조차 세우기도 힘들어졌으니 이번과 같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만 해도 행운인 것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11시 40분이 다 되어 갑니다. 1999년에 개장했다는 공항은 한산하기 그지 없습니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아마 아침에는 비가 왔던 듯 땅이 젖어 있습니다. 온도는 높지 않지만 습도가 높아서 상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네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이 자리에 앉아서 인천 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때 어떤 추억을 가지고 돌아와 있을지 설레는 마음입니다. 상해 발 로마 행 비행기의 탑승이 막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