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2013년 6월 1일 - 10일) #2: 중앙아시아 상공에서 (1일차)
목적지에 도착해야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며칠 전, 몇 주 전, 아니면 몇 달 전에 여행 계획을 세우고 숙소를 예약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면서부터 설레고 즐겁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곧 떠나게 될 여행을 상상하고 주변 사람들과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 얘기를 하다보면 그 기대는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이제 출발하기 전 날이 되면 짐을 챙기고 설레는 마음에 밤잠을 설치다가 여행날 아침이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섭니다. 이런 설렘이 여행지까지 가는 여정 또한 추억으로 담게 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좁은 의미에서 말하더라도 여행은 그 날 아침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 여행과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다른 여행이 되는 것처럼요.
최근에 들어서 여러 번 여행을 다니게 되었지만, 불과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저에게는 아주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탄 횟수 자체가 왕복 다섯 번에 불과했고 그 중 가장 멀리 가 본 곳은 2박 3일간 신입사원 연수가 있었던 북경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 본 적이 별로 없으니 면세점 쇼핑도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번에 사지 못하면 다음엔 언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었지요. 최근 2~3년간 여행 기회가 많아져서 이제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예전처럼 신기하지는 않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서 점점 땅과 멀어지는 장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천을 출발하는 것이 서울시간으로 오전 8시 55분, 로마에 도착하는 것이 로마시간으로 오후 7시. 시차 7시간을 감안하면 모두 17시간의 여정입니다. 상해 푸둥공항에 머무는 3시간을 제외하더라도 14시간을 꼬박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인천에서 상해까지는 1시간 반, 상해에서 로마까지는 12시간 반이 걸리지요.
일상의 반복되는 삶에 지쳐 여행을 떠났을 때,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현실을 벗어나는 느낌의 정도는 여행지의 지리적 거리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멀리 여행을 떠날수록 더 좋은 휴식을 취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누구든지 근처로 떠나는 여행보다 멀리 떠나는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더 많이 설레겠지만 멀리 떠나는 것 때문에 이동이 불편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할 점입니다.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는 경제적인 우리의 사정이라면, 비행기 여행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좁은 좌석에 앉아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하는 데다가 싼 항공사를 찾다보니 국적기를 포기한 것도 불편함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한계가 있을테니 그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 줄 무언가를 준비해야 했는데, 그 준비하느라고 짐을 늘릴 수는 없으니 결국 그 준비란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패드에 영화 몇 편을 담아 오는 정도였습니다. 중첩된 불행이라고 하자면, 전날 정신이 없었던 탓에 충전을 절반 정도 밖에 하지 못했는데 비행기인 A330에는 전원공급장치가 없어서 여정의 절반 정도 온 지금 (이륙 후 6시간 30분 경과) 배터리는 고작 10% 정도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 비행기의 탑승객의 상당수는 중국인 여행객입니다. 그들에게는 로마까지 가는 직항편이자 국적기인 이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서로 엄청나게 큰 소리로 대화를 했던지라 처음에는 싸우는 것이 아닌가 싶었더랬죠. 설마 고속버스를 타고 단체 여행을 하는 것처럼 한창 비행 중에 통로에서 노래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도 하고 이륙하기도 전부터 이 사람들을 제 자리에 앉히고 설명을 해 주느라 이미 다섯 시간 쯤 비행한 것 같은 스튜어디스가 안쓰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면 다행히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외에는 한국에서부터 같은 여정을 밟고 있는 분들도 일부 보이고, 서양인들도 조금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꿈 같은 로마 여행을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수도 있겠지요.
[상하이 - 로마 항로]
구체인 지구의 특성 상, 항로는 평면지도에 놓고 보면 마치 돌아가는 것 같은 모양입니다. 상해를 출발한 비행기는 줄곧 북쪽으로 날아가다가 북경 언저리에서 방향을 서북쪽으로 돌려서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지나갑니다. 이런 코스라면 카스피해를 북쪽으로 지나 우크라이나, 동유럽을 거쳐 동북쪽에서부터 이탈리아로 접어들 것입니다. 아드리아 해를 건너기 전까지 계속 대륙 위를 비행하는 경로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내 땅을 보면서 가는 여행은 처음입니다. 구름이 많지 않아서 지형이 생각 외로 잘 보이는데, 곳곳에 얼룩덜룩 그늘져 보이는 곳들이 있어서 저게 뭔가 하고 한참을 쳐다 보았더니 구름의 그림자더군요. 문자 그대로 그늘이지요. 구름과 그 그림자를 비행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구름이 마치 지표면 가까이에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만큼 비행기가 높이 있다는 것인데, 비행고도는 약 11,000m 입니다. 상용 항공기의 통상적인 비행고도지요. 호수나 저수지처럼 보이는 물웅덩이도 여럿 있습니다. 11km 밖에서 보는 것이라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클 수도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연스러운 푸른 선과 인위적인 옅은 갈색 선도 보입니다. 전자는 하천이고 후자는 도로인데, 도로를 따라서 중간중간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자리가 주날개의 바로 옆이라서 밖의 경치 대부분이 날개에 가리기는 합니다만, 바다 위를 날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은 한 동안 바라보아도 쉽게 질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번 비행의 또 한 가지 특징이라면, 해가 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 서울 시간으로는 오후 8시 30분이고 상해 시간으로도 오후 7시 30분입니다만 이곳은 대낮처럼 밝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대낮처럼 밝은 줄 알았는데 이 곳은 대낮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밑에 보이는 마을은 아마 오후 네 다섯 시 정도일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방향과 반대인 서쪽으로 날아가는 탓에 시간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태양에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돌아가는 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가는 작은 점처럼 보일 겁니다. 로마에는 현지시간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니 비행하는 내내 낮일 겁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긴 오후가 될 겁니다. 해가 지지 않거나 해가 뜨지 않는 경험은 북극이나 남극에 가 봐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밝은 낮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좋은 경험이지요. 야외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좀 더 실감이 났겠지만, 어두운 기내에만 있다보니 이미 이 자체로 시간의 흐름에 무덤해져서 실감이 덜 한 것 같아 아쉽긴 합니다. 돌아갈 때는 반대일 겁니다. 시계는 시간보다 빨리 돌 것이고, 낮도 짧고 밤도 짧아지겠지요.
아침도 기내식으로, 점심도 기내식으로 먹어서 배가 고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저녁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픕니다. 그야말로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지만 현재 시간은 서울 시간으로 오후 9시입니다. 이 양반들이 왜 밥을 안 주는지 모르겠네요. 저도 배가 고프고 아이패드도 배가 고픕니다. 이제 배터리는 5% 정도 남았네요. 중간 중간 있는 모니터에서는 영어 음성과 중국어 자막의 영화가 한창 돌아가는 중입니다. 비행기는 슬슬 유럽으로 접어들 것 같습니다. 로마는 오후 2시입니다. 비행은 아직 다섯 시간이 더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