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개자리로 가는 길/영화조각
Schindler's List; 생명의 가치
iulius
2009. 4. 9. 21:10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
영화가 끝날 무렵,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소련군을 피해 브린리츠 수용소Brinnlitz camp를 탈출한다. 차에 올라타기 전, 쉰들러는 그가 구한 천 명의 유대인들과 작별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크라코프Krakow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를 도왔던 이츠하크 슈턴Itzhak Stern으로부터 반지 하나를 건네 받는다. 반지는 쉰들러의 유대인 중 한 명의 은이빨을 녹여 만든 것으로, 그 안쪽에는 탈무드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강요된 감동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는 감동적이기 마련이다. 애초에 실화를 영화화한다는 것 자체가 관객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감동을 주고자 하는 목적인 경우가 많기도 하거니와 관객들은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점에서 능동적으로 감동을 받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영화를 진행시켜도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유의해야 할 점 중 하나로 관객이 감동을 강요받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은 이미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동안에 '전세계를 울린 감동의 실화' 따위의 선전문구를 수도 없이 보고 들어갈테니 말이다.
'2차 대전 때 죄 없이 학살당하던 유대인들을 구한 기업가의 얘긴데, 그 기업가가 글쎄 독일인이래. 감동적이지 않냐?' 정도로 물어본다면 그래, 감동적이다만, 알았다고 고개 끄덕이고 있는데 '그 독일인이 전재산을 털어서 유대인들을 구한거래, 진짜 감동적이지 않냐?',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가 뒤로 뇌물 써서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대, 진짜 감동적이지 않냐?' 라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질문이 반복됨에 따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반비례하여 줄어들 것이다. 마치 2~30년 전의 반공영화, 요즘도 제작되고 있는 군 홍보영화를 보고 나서 진심으로 북한 공산 빨갱이들을 다 때려잡아 우리의 숙원인 민주통일을 달성해야겠다고 다짐한다든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군인들에게 감사하고 반드시 나중에 전방 수색대에 지원해야겠다고 다짐하는게 쉽지 않은 것과도 같다.
그래서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감동을 전하고자 할수록, 영화는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만들 정도의 일이면 담담히 얘기하기만 해도 관객들은 알아서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뛰어들테니까. (개인적으로는 그 점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2% 아쉬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쉰들러리스트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는 아니다. 일련의 흐름을 가지는 에피소드는 오로지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만을 갖고 있었던 쉰들러가 점차 유대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유대인을 구해내는 과정에 관객을 몰입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흑백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이것은 마치 다큐멘터리나 기록영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아무리 감독이 요소요소에 관객을 향해 의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을 배치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어디에선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들어왔던 관객들은 그 메시지가 의도적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쉰들러리스트에서 감정을 강요받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그 장면만은 예외였다.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무참히, 무고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진 독일인 기업가.
그가 구해낸 천 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한 명을 더 못 구한것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살아남은 유대인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영화들이 가족사랑이나 인류평화와 같은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결국 이 장면은 그의 그런 특징을 반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집이 영화의 옥의 티라고 생각하면서 얼마전까지도 나는 "쉰들러리스트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그 장면만 제외하고."라고 평가했었다. 최근에 세 번 정도 영화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명단은 선의 극치입니다. 이 명단은, 생명입니다.(This list is an absolute good. This list, is life.)
영화에서 아몬 괴트Amon Goeth 나치 친위대 대위가 플라스쵸프 수용소Krakow-Plaszow Konzentrationslager의 폐쇄를 명령받자, 쉰들러는 구해낼 수 있는 유대인의 명부를 작성한다. 쉰들러의 유대인 1천여 명의 명단을 작성하던 도중, 슈턴은 쉰들러가 유대인 한 명, 한 명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이 명단을 작성할 권리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슈턴에게 쉰들러는 내심 담담하게 말했다.
과연 쉰들러리스트는 무슨 의미였을까.
그동안 내가 쉰들러리스트를 생각할 때는 항상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신들이 고난에 대해서 좀 더 남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런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 영화도 결국 오스카 쉰들러라는 의인을 소개하기 보다는 그 과정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얼마나 반인류적이고 악랄한 인종청소였는지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 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나왔을 때 거부반응이 들었던 것이다.
너네 힘든 시절을 헤쳐나온 건 다 이해해. 그 때 믿을 수 없게 독일인이 너네를 도와줬단 얘기도 잘 봤어. 그렇게 대놓고 얘기 안 해도 충분히 감동 받고 있다고.
마치 매일 저녁 열두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아침 밥상 머리에서 부모님이 "이제 정신차리고 공부 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씀하시거나, 일주일에 용돈 5만원으로 교통비, 식비를 해결하며 다니고 있는데 "돈 좀 아껴써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확 올라오는 그런 것이랄까.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접어두면 어떨까. 이 영화가 순수하게 의로운 독일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이다. 초점을 유대인 박해에서 쉰들러리스트로 옮길 때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괴트의 가정부로 일했다가 결국에는 쉰들러의 유대인이 된 헬렌 히르쉬다.
헬렌 히르쉬
헬렌은 아몬 괴트의 빌라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의 가정부로 생활한다. 그를 고용한 아몬 괴트는 플라스쵸프에 수용된 유대인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으며, 그 권한을 아껴두고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니, 헬렌의 삶이란 죽음 바로 옆에서 하루하루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파티가 있던 날 밤 헬렌은 쉰들러에게 고충을 토로한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체 무슨 기준으로 죽고 살고가 결정되는지를 알 수 없다고 울먹인다. 그런 그녀에게 쉰들러는 괴트가에게 있어서 어떤 유대인을 죽일지 살릴지 구분하는 기준은 그 유대인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헬렌은 괴트에게 너무 의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않을 거라고 위로한다.
쉰들러의 말처럼, 영화에서 괴트가 헬렌에게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소하게는 쉰들러가 괴트를 처음 찾아온 날 술을 가져온 헬렌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따라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부터, 헬렌에게 전쟁이 끝나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거나, 마지막에는 그녀를 절멸 수용소로 보낼 수 없으니 숲에서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까지, 괴트에게 있어서 헬렌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헬렌은 쉰들러에게 있어서도 그냥 유대인이 아니다. (헬렌이 괴트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는 은근슬쩍 결론적으로 헬렌이 쉰들러에게도 의미있는 사람이라고 묻어서 넘어가는데, 영화를 보면 그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이것은 쉰들러가 명단을 작성하는 장면에서 헬렌이 차지하는 비중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시간적 비중만을 고려한다면, 헬렌은 리스트에 포함된 다른 천 백 명의 유대인과 맞먹는 중요성을 가진다. 게다가 쉰들러가 슈턴과 리스트를 작성할 때 보면 사업 투자자, 공장 노동자, 암시장 중개인(사실은 쉰들러의 암시장 중개인이었던 폴덱 페퍼버그Poldek Pfefferberg는 실수로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우연히 아는 인물을 만나 브린리츠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등 어느 정도 구해낼 도의적 의무가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식인데, 유독 헬렌의 경우를 보면 쉰들러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당위성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도 그녀를 놓고 괴트와 흥정하는 장면까지 등장하는 등, 헬렌은 천 백 명의 유대인 중 무언가 특별한 유대인이었다.
왜일까?
그것은 헬렌이 쉰들러에게도, 그리고 감독에게도 사람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쉰들러 스스로가 말했듯이 그의 사람들(They are my people)이었다. 그러나 헬렌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헬렌이 내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헬렌을 구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소중한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리스트에 올라있는 이름은 아직은 그냥 이름이었다. 마치 마지막 장에 여백이 남으면 "다섯 개만 더 써봐"라고 대우받는 글귀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슈턴이 수용소로 끌려갈 뻔 할 때 독일군 중사가 쉰들러에게 "명단은 그저 명단일 뿐이까요. 그게 누구든지 우리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서류 작업이 귀찮아질 뿐이죠"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저 슈턴과 마주 앉아서 명단을 작성하는 것 뿐이었다면, 쉰들러리스트와 수용소행 리스트의 차이점은 없을 것이다. 한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살고, 다른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것이라는 것 외에는. 그러나 헬렌의 이야기가 개입되면서, 비로서 그 이름 하나하나는 생명을 부여받은 실체가 된다.
헬렌은 반드시 살려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를 살려낸다는 행위는 곧 그녀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같고, 그 리스트는 단순한 알파벳의 나열이 아닌 생명을 담은 절대적인 선, 선의 극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의 가치
슈턴이 "우릴 모두 사신건가요"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쉰들러를 쳐다보자 쉰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내 직원이라면 나 좀 말려줘. 아주 비싸게 들고 있다고."
쉰들러는 이 시점에서도 그의 생명의 리스트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제대로 몰랐던 게 아닐까. 물론 그는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많을 것이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브린리츠로의 이송 준비, 새 공장의 가동 준비, 새 수용소를 자신의 통제 하에 운영할 준비도 갖춰야 했다. 그 모든 것은 비용의 지출과 위험 부담을 의미했다. 유대인을 살리겠다는 그의 의지는 반역에 가까운 행위였고, 아무리 힘있는 친구들을 뒤에 두고 있더라도 그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리는 없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위험을 감수했고 비싼 값을 치루었다. 전쟁을 통해 돈을 벌려고 크라코프로 온 사람이 전재산을 털어 그 일을 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된 날 밤, 공장에서 유대인과 독일군을 모아 놓고 얘기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담담하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은, 우리는 잘 헤쳐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사실은 내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 글의 맨 첫머리에서 언급한 장면을 통해 밝혀진다.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유대인들을 살려낸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한 명의 은이빨을 녹여 만든 반지를 받은 것이다. 그 반지는 아마 쉰들러가 지불했던 돈과 비교하면 먼지만큼도 되지 않는 가격에 불과했겠지만, 쉰들러는 그 반지를 받으면서 비로서 자기가 했던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리스트의 이름 하나 하나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 한 명 한 명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유대인들을 빼내왔지만, 사실은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사기에는 그 돈이 하잘것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서 깨달은 것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살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은 돈, 금은보화, 권력이 있어도 생명을 사고 팔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는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생명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수준으로 떨어진만큼 돈의 가치는 올라간다. 그가 가진 돈은 곧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천 백 명을 구한 의인도, 담담하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성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고 좀 더 필사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돈 때문에, 다른 일로, 무슨 이유에서건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살릴 수 있었던 생명 몇이 죽음으로 이르렀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자신이 못 한 일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그에게 건네진 반지에 적힌 글귀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에서 그는 그가 구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곧 세상 전체와 같음을 알았고, 그를 구하는 비용이라는 게 겨우 넥타이핀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쉰들러가 그 진실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인 동시에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생명에 가격이 매겨지던 그 시대가 얼마나 비참했던 시대였는지를. 영화는 이 부분에서 값싼 감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 Schindler's List 관련 포스트 목록 ==
2009/04/09 - Schindler's List; 조각모음
2009/04/09 - [way to Canis Major/a piece of Movie] - Schindler's List; 생명의 가치(You're here)
영화가 끝날 무렵,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소련군을 피해 브린리츠 수용소Brinnlitz camp를 탈출한다. 차에 올라타기 전, 쉰들러는 그가 구한 천 명의 유대인들과 작별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가 크라코프Krakow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를 도왔던 이츠하크 슈턴Itzhak Stern으로부터 반지 하나를 건네 받는다. 반지는 쉰들러의 유대인 중 한 명의 은이빨을 녹여 만든 것으로, 그 안쪽에는 탈무드의 구절이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쉰들러는 북받치는 감정에 반지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떨어뜨린다. 반지를 주워든 그는 슈턴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한다.
-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어쩌면 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만약 내가... 좀 더 구할 수도 있었어...슈턴은 고개를 저었지만 쉰들러는 계속 자책했다.
- 사장님 덕분에 천 백 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결국 쉰들러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막 벗어난 유대인들이 둘러싸고, 그를 끌어 안으며 같이 눈물을 흘린다.
-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다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어.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거야. 내가 만약...
- 사장님 덕분에 후손이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 충분히 하지 못했어.
- 그 이상으로 하셨어요.
- 이 차! 괴트한테 이 차를 팔 수도 있었어. 그랬으면 열 명은 더 구했을거야. 이 배지니까 두 명, 금이니까, 두 명은, 아니 최소한 한 사람 몫은 쳐 줬을거야. 최소한 한 명을 더 데려올 수 있었어. 한 사람. 내가 최소한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난 그렇게 안 했어. 내가 그렇게 안 한거야...
강요된 감동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는 감동적이기 마련이다. 애초에 실화를 영화화한다는 것 자체가 관객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감동을 주고자 하는 목적인 경우가 많기도 하거니와 관객들은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점에서 능동적으로 감동을 받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영화를 진행시켜도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유의해야 할 점 중 하나로 관객이 감동을 강요받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은 이미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동안에 '전세계를 울린 감동의 실화' 따위의 선전문구를 수도 없이 보고 들어갈테니 말이다.
'2차 대전 때 죄 없이 학살당하던 유대인들을 구한 기업가의 얘긴데, 그 기업가가 글쎄 독일인이래. 감동적이지 않냐?' 정도로 물어본다면 그래, 감동적이다만, 알았다고 고개 끄덕이고 있는데 '그 독일인이 전재산을 털어서 유대인들을 구한거래, 진짜 감동적이지 않냐?',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가 뒤로 뇌물 써서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대, 진짜 감동적이지 않냐?' 라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질문이 반복됨에 따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반비례하여 줄어들 것이다. 마치 2~30년 전의 반공영화, 요즘도 제작되고 있는 군 홍보영화를 보고 나서 진심으로 북한 공산 빨갱이들을 다 때려잡아 우리의 숙원인 민주통일을 달성해야겠다고 다짐한다든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군인들에게 감사하고 반드시 나중에 전방 수색대에 지원해야겠다고 다짐하는게 쉽지 않은 것과도 같다.
그래서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감동을 전하고자 할수록, 영화는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만들 정도의 일이면 담담히 얘기하기만 해도 관객들은 알아서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뛰어들테니까. (개인적으로는 그 점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2% 아쉬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쉰들러리스트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는 아니다. 일련의 흐름을 가지는 에피소드는 오로지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만을 갖고 있었던 쉰들러가 점차 유대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유대인을 구해내는 과정에 관객을 몰입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흑백으로 제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이것은 마치 다큐멘터리나 기록영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아무리 감독이 요소요소에 관객을 향해 의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을 배치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어디에선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들어왔던 관객들은 그 메시지가 의도적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쉰들러리스트에서 감정을 강요받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그 장면만은 예외였다.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무참히, 무고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진 독일인 기업가.
그가 구해낸 천 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한 명을 더 못 구한것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살아남은 유대인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영화들이 가족사랑이나 인류평화와 같은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결국 이 장면은 그의 그런 특징을 반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집이 영화의 옥의 티라고 생각하면서 얼마전까지도 나는 "쉰들러리스트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그 장면만 제외하고."라고 평가했었다. 최근에 세 번 정도 영화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 명단은 선의 극치입니다. 이 명단은, 생명입니다.(This list is an absolute good. This list, is life.)
영화에서 아몬 괴트Amon Goeth 나치 친위대 대위가 플라스쵸프 수용소Krakow-Plaszow Konzentrationslager의 폐쇄를 명령받자, 쉰들러는 구해낼 수 있는 유대인의 명부를 작성한다. 쉰들러의 유대인 1천여 명의 명단을 작성하던 도중, 슈턴은 쉰들러가 유대인 한 명, 한 명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이 명단을 작성할 권리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슈턴에게 쉰들러는 내심 담담하게 말했다.
- 아직도 내 직원이라면 나 좀 말려줘. 아주 비싸게 들고 있다고.작성을 마친 슈턴은 떨리는 목소리로 쉰들러에게 말한다.
- 보세요. 이 명단은 선의 극치입니다. 이 명단은, 생명입니다.(Look, this list is an absolute good. This list, is life.)아마도 슈턴은 그 순간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아주 잘 표현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도 그 감동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영화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버린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쉰들러리스트의 의미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잠시의 여유도 없이 곧바로 우리는 괴트와 쉰들러가 헬렌 히르쉬Helen Hirsch를 명단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두고 블랙잭을 할지 말지 아웅다웅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과연 쉰들러리스트는 무슨 의미였을까.
그동안 내가 쉰들러리스트를 생각할 때는 항상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신들이 고난에 대해서 좀 더 남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런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 영화도 결국 오스카 쉰들러라는 의인을 소개하기 보다는 그 과정에서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얼마나 반인류적이고 악랄한 인종청소였는지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 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나왔을 때 거부반응이 들었던 것이다.
너네 힘든 시절을 헤쳐나온 건 다 이해해. 그 때 믿을 수 없게 독일인이 너네를 도와줬단 얘기도 잘 봤어. 그렇게 대놓고 얘기 안 해도 충분히 감동 받고 있다고.
마치 매일 저녁 열두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아침 밥상 머리에서 부모님이 "이제 정신차리고 공부 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씀하시거나, 일주일에 용돈 5만원으로 교통비, 식비를 해결하며 다니고 있는데 "돈 좀 아껴써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확 올라오는 그런 것이랄까.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접어두면 어떨까. 이 영화가 순수하게 의로운 독일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이다. 초점을 유대인 박해에서 쉰들러리스트로 옮길 때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있다. 괴트의 가정부로 일했다가 결국에는 쉰들러의 유대인이 된 헬렌 히르쉬다.
헬렌 히르쉬
헬렌은 아몬 괴트의 빌라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의 가정부로 생활한다. 그를 고용한 아몬 괴트는 플라스쵸프에 수용된 유대인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으며, 그 권한을 아껴두고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니, 헬렌의 삶이란 죽음 바로 옆에서 하루하루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파티가 있던 날 밤 헬렌은 쉰들러에게 고충을 토로한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체 무슨 기준으로 죽고 살고가 결정되는지를 알 수 없다고 울먹인다. 그런 그녀에게 쉰들러는 괴트가에게 있어서 어떤 유대인을 죽일지 살릴지 구분하는 기준은 그 유대인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헬렌은 괴트에게 너무 의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않을 거라고 위로한다.
쉰들러의 말처럼, 영화에서 괴트가 헬렌에게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소하게는 쉰들러가 괴트를 처음 찾아온 날 술을 가져온 헬렌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따라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부터, 헬렌에게 전쟁이 끝나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거나, 마지막에는 그녀를 절멸 수용소로 보낼 수 없으니 숲에서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까지, 괴트에게 있어서 헬렌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헬렌은 쉰들러에게 있어서도 그냥 유대인이 아니다. (헬렌이 괴트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는 은근슬쩍 결론적으로 헬렌이 쉰들러에게도 의미있는 사람이라고 묻어서 넘어가는데, 영화를 보면 그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이것은 쉰들러가 명단을 작성하는 장면에서 헬렌이 차지하는 비중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시간적 비중만을 고려한다면, 헬렌은 리스트에 포함된 다른 천 백 명의 유대인과 맞먹는 중요성을 가진다. 게다가 쉰들러가 슈턴과 리스트를 작성할 때 보면 사업 투자자, 공장 노동자, 암시장 중개인(사실은 쉰들러의 암시장 중개인이었던 폴덱 페퍼버그Poldek Pfefferberg는 실수로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우연히 아는 인물을 만나 브린리츠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등 어느 정도 구해낼 도의적 의무가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식인데, 유독 헬렌의 경우를 보면 쉰들러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당위성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도 그녀를 놓고 괴트와 흥정하는 장면까지 등장하는 등, 헬렌은 천 백 명의 유대인 중 무언가 특별한 유대인이었다.
왜일까?
그것은 헬렌이 쉰들러에게도, 그리고 감독에게도 사람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쉰들러 스스로가 말했듯이 그의 사람들(They are my people)이었다. 그러나 헬렌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헬렌이 내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헬렌을 구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소중한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리스트에 올라있는 이름은 아직은 그냥 이름이었다. 마치 마지막 장에 여백이 남으면 "다섯 개만 더 써봐"라고 대우받는 글귀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슈턴이 수용소로 끌려갈 뻔 할 때 독일군 중사가 쉰들러에게 "명단은 그저 명단일 뿐이까요. 그게 누구든지 우리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서류 작업이 귀찮아질 뿐이죠"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저 슈턴과 마주 앉아서 명단을 작성하는 것 뿐이었다면, 쉰들러리스트와 수용소행 리스트의 차이점은 없을 것이다. 한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살고, 다른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것이라는 것 외에는. 그러나 헬렌의 이야기가 개입되면서, 비로서 그 이름 하나하나는 생명을 부여받은 실체가 된다.
헬렌은 반드시 살려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를 살려낸다는 행위는 곧 그녀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같고, 그 리스트는 단순한 알파벳의 나열이 아닌 생명을 담은 절대적인 선, 선의 극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의 가치
슈턴이 "우릴 모두 사신건가요"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쉰들러를 쳐다보자 쉰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내 직원이라면 나 좀 말려줘. 아주 비싸게 들고 있다고."
쉰들러는 이 시점에서도 그의 생명의 리스트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제대로 몰랐던 게 아닐까. 물론 그는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많을 것이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브린리츠로의 이송 준비, 새 공장의 가동 준비, 새 수용소를 자신의 통제 하에 운영할 준비도 갖춰야 했다. 그 모든 것은 비용의 지출과 위험 부담을 의미했다. 유대인을 살리겠다는 그의 의지는 반역에 가까운 행위였고, 아무리 힘있는 친구들을 뒤에 두고 있더라도 그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리는 없다. 그리고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구하고자 했다. 그는 위험을 감수했고 비싼 값을 치루었다. 전쟁을 통해 돈을 벌려고 크라코프로 온 사람이 전재산을 털어 그 일을 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된 날 밤, 공장에서 유대인과 독일군을 모아 놓고 얘기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담담하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은, 우리는 잘 헤쳐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사실은 내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 글의 맨 첫머리에서 언급한 장면을 통해 밝혀진다.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유대인들을 살려낸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한 명의 은이빨을 녹여 만든 반지를 받은 것이다. 그 반지는 아마 쉰들러가 지불했던 돈과 비교하면 먼지만큼도 되지 않는 가격에 불과했겠지만, 쉰들러는 그 반지를 받으면서 비로서 자기가 했던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리스트의 이름 하나 하나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 한 명 한 명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유대인들을 빼내왔지만, 사실은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사기에는 그 돈이 하잘것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서 깨달은 것이다.
생명은 무엇으로도 살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은 돈, 금은보화, 권력이 있어도 생명을 사고 팔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는 생명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생명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수준으로 떨어진만큼 돈의 가치는 올라간다. 그가 가진 돈은 곧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천 백 명을 구한 의인도, 담담하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성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고 좀 더 필사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돈 때문에, 다른 일로, 무슨 이유에서건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살릴 수 있었던 생명 몇이 죽음으로 이르렀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자신이 못 한 일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그에게 건네진 반지에 적힌 글귀 "한 사람을 구하는 자, 세상을 구하리라(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에서 그는 그가 구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곧 세상 전체와 같음을 알았고, 그를 구하는 비용이라는 게 겨우 넥타이핀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쉰들러가 그 진실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인 동시에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생명에 가격이 매겨지던 그 시대가 얼마나 비참했던 시대였는지를. 영화는 이 부분에서 값싼 감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 Schindler's List 관련 포스트 목록 ==
2009/04/09 - Schindler's List; 조각모음
2009/04/09 - [way to Canis Major/a piece of Movie] - Schindler's List; 생명의 가치(You'r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