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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인들은 비록 마지못해 시속을 따른다 하더라도 사치를 숭상해서는 안된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웅황판, 법랑잠, 진주수로 꾸며서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그 가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으므로 부녀들은 더욱 사치스럽게하여 행여 더 크게 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중
'사소절'에서 발췌
민족문화추진회 번역본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침모였다. 나는 초노였다.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어머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노비였다. 어머니는 달을 두고 오동나무가 꼭 한 그루 갖고 싶다 했다. 어머니는 딸을 낳을 거라 했다.
"안채에 오동나무 있지? 그건 셋째 애기씨 태어나셨을 때 심은 거란다. 원래 딸은 낳으믄 나중에 시집갈 때 농 짜가라고 오동나무 심거든. 첫째 애기씨랑 둘째 애기씨도 시집가실 때 오동나무로 장롱 해 가시구. 안채에 밑동만 남은 오동나무가 그건데 마님께서 시집간 애기씨들 보고 싶으실 때마다 그 밑동을 손으로 문질러서 그게 반질반질 윤이 나는 거랜다. 아마 셋째 애기씨도 시집가실 때 오동나무로 장롱 하나 해 가지구 가시겠지. 그러구보니 세월이 빠르네. 내가 마님 따라 교전비로 여기 올 때 마님 농이 어찌나 부럽든지 마님 몰래 손으로 쓸어 보구 그랬는데 어느새 마님도 애기씨들 시집 보내시구."
"어머니 오동나무는요?"
"종년이 무슨 오동나무래니. 심을 데도 없는데. 행랑채 마당에다가 심을 수도 없구. 종년종놈이야 주인마님이 맺어주시면 그날로 물 한 그릇 떠다 놓고 혼례 치르는 건데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농이 다 뭔 필요 있니. 근데 살림차릴 때 오동나무 장롱은 아니더래도 조그만 머릿장 하나라도 들고 오고 싶긴 하더라. 아이구, 종년이 허구헌날 바느질하느라 비단천 만지작거리니까 무슨 마나님이 된 것 마냥 바람이 든 거지 뭐냐."
어머니는 바느질 할 때면 늘 나를 옆에다 앉혀 놓고 손으로는 바느질을 하고 입으로는 내게 두런두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때로는 세책가에서 듣고 온 얘기를 내게 그대로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끔 말끝에 "계집에가 좋은데. 사내애는 아무래도 무뚝뚝해서."라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태어날 내 여동생에게 오동나무를 한 그루 심어주고픈 거다.
나는 안채로 향했다. 연보랏빛 오동꽃이 한창이었다. 오동꽃이 피면 모내기철이어서 온 집안이 바빴다. 안채 마님도 바쁘셔서 안채에는 아무도 없는듯 했다. 나무가 높기는 했지만 가지를 딛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고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 오동꽃을 따서 내려오려는데 어느새 나무 아래 셋째 애기씨가 서 계셨다.
"도둑놈! 오동꽃 도둑놈!"
그냥 오동꽃 따지 말라고 하셔도 될 것을 '도둑놈'이라고 하시니 어딘지 발끈하는 감정이 나왔다.
"소인이 왜 도둑놈이에요!"
"남의 나무에 허락도 없이 올라가서 꽃을 꺾으면 도둑놈이지 뭐야!"
"겨우 꽃 한 송이 가지고 옹졸하고 치사하게..."
이번에는 애기씨가 성이 나셔서 눈을 치뜨고 나를 올려다보셨다. 애기씨께서 발끈하신 걸 보니 통쾌해서 애기씨를 더 놀려먹기로 했다. 나는 나무 위에 있고 애기씨는 나무 아래 계시니 내가 깐죽댄다 해도 애기씨께서 어쩌지 못 할 터였다.
"이 나무가 치사하고 옹졸하고 덕 없으신 애기씨 거였어요? 나무에 무슨 주인이에요? 비 내려주고 뿌리 뻗게 해 주는 하늘하고 땅이 주인이면 주인이지."
"네 이놈! 당장 내려오지 못 해?"
"애기씨께서 올라오시든지요."
더는 참을 수 없으셨는지 애기씨께서 나무를 타기 시작하셨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혹시나 애기씨께서 발을 헛디뎌서 다치기라도 하시면 이건 오동꽃 꺾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애기씨, 어서 내려가세요. 소인이 잘못했어요. 애기씨께서 다치시면 소인이 마님께 혼나요."
내 말에 애기씨는 더 신이 나셔서 기어이 나무 위로 올라오셨다. 나는 나무 위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계속 주위만 살폈다. 애기씨께서 마당에서 놀기만 하셔도 회초리를 드시는 마님께서 애기씨께서 나무 위에 올라가셨단 걸 아시면 내가 어찌될 지는 뻔했다.
"범아, 나무 타는 거 생각보다 재밌어."
내게 성질부리시던 것도 잊으셨는지 애기씨는 신이 나셨다. 어느새 내가 있는 곳까지 올라오신 애기씨의 입이 벌어졌다.
"와, 높다. 좀만 높으면 도성 안이 다 보일 것 같애. 한양이 이렇게 생겼구나."
아니 뭐 동네 생긴 것 보고 그렇게 신기해하시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양반집 부녀자들은 바깥 출입도 맘대로 못하고 늘 집 안에 있어야 했다. 나가도 해진 후에 나가거나 뚜껑 달린 가마를 타고 나가거나 해야 했다. 집안에서만 사는 게 답답할까봐 안채 마루를 높여서 담 밖이 보이게 했다고는 하지만 보여봤자 집 앞이 전부였다. 내게는 평범한 저잣거리 풍경도 애기씨에게는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시장을 가리키시며 이건 뭐야 저건 뭐야 계속 물어보셨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마님께서 안채로 들어오시는 게 보였다. 나는 얼른 낮은 나뭇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렸지만 애기씨께서는 나를 때라 뛰어내리시다가 그만 무릎이 발보다 먼저 땅에 닿고 말았다. 애기씨께서는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셨지만 얼굴을 찡그리셨다.
"괜찮아. 별로 안 다쳤어. 어머니께는 말씀 안 드릴게."
아까 치사하고 옹졸하다고 했던 것을 마음속으로 취소하면서 내 손안에서 거의 으깨진 오동꽃을 애기씨께 내밀었다.
"너 가져."
"어머니한테 애기씨께서 주셨다고 할게요."
"침모가 이게 갖고 싶댔어?"
"아니오, 그냥. 오동나무가 좋으시대요."
"그럼 그거 침모 갖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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