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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대학살 ==
결국 일본은 상해를 점령했으며, 드디어 1937년 12월에는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에서는 일본군의 잔악행위가 극에 달해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남경 시민 수십 만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학살 방법은 잔인함 그 자체였다. 진격로에 장애가 되는 마을은 항공기를 동원해서 초토화 시켰고, 주민들을 모아 놓고 휘발류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죽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들은 강간한 뒤에 죽창에 찔러 죽였고, 울고 있는 아이는 일본도로 베어 죽였으며, 중국군에 지원할 우려가 있는 20~30대의 중국 청년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장총으로 머리를 사격해서 죽였다. 물론, 수만 명의 중국군 포로들도 남경 외곽에서 구덩이를 파고 몰아넣은 후 수류탄과 기관총 세례를 가해 몰살시켰다. 남경은 통곡의 도시가 되었으며 온 도시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전후 조사에 의하면 남경대학살의 희생자는 30만 명에 이른다고 하며,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남경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어린이 859구, 부녀자 2,127구 포함)였고, 그 밖에 양쯔강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버려졌다고 한다.
[일본 폭격기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체가 쌓여 있는 중경 시가의 처참한 모습. 일본은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폭격을 서슴지 않았다. 전후에 일본은 B-29의 집중 폭격을 받아 많은 도시가 폐허가 된 것에 대해서 미군이 저항능력이 없는 시민을 상대로 비인도주의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천벌이었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중국인에게 공포를 심어 전의를 잃게 만들려 했던 일본의 잔혹행위는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결국 벼랑 끝에 몰린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결국 일본은 중국군의 유격전에 빠져들었고 이미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 데에도 벅찬 형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일본군은 삼광작전(三光作戰: 殺光, 燒光, 光) 등 각종 잔학행위로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중국인 1,200만 명을 죽였으며,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중국 민족 그 자체를 적으로 한 전쟁이라는 느낌을 중국인에게 주었고 중국 내의 항일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었다. 결국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했지만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중일전쟁은 일본의 계획과는 달리 장기화되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중국전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 타오르는 중국의 하늘 ==
한편, 제대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중국군은 제대로 된 항공전력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은 무저항의 중국하늘을 완전히 농락했으며 무차별 폭격을 퍼부으면서 육군의 진격로를 텄다. 그러나 중국에 점차로 원조의 손길이 뻗치면서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에서 구식으로 치부되던 항공기들이 중국의 요청으로 긴급히 원조되었다. 그리하여 일본군과 중국군 간에 항공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아시아의 하늘을 피로 물들인 태평양 항공전의 시발점이었다.
[1937년 중국하늘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항공대의 Ki 27 전투기, 일본군은 이미 1930년대 중반 이런 우수한 저익 단엽전투기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전투기의 성능은 중국군이 가지고 있던 유럽이나 미국의 중고 전투기를 압도했다고 한다]
일본은 1차대전 이후에 유럽의 정세를 살펴본 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유럽에 많은 기술자를 파견하여 항공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그리고 착실히 서구의 기술을 모방했고, 비행기 엔진의 국산화를 독려해 왔었다. 이러한 결과 중일전쟁이 벌어질 무렵에는 육군과 해군이 자국산 전투기와 폭격기들만으로 편제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실 이 무렵만 해도 유럽이나 미국은 일본의 항공전력에 대해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1930년대는 유럽에서 독일이 점차로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 나가고 있었고 세계의 이목이 독일, 프랑스,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조차도 일본보다는 유럽 전장을 미래의 전장으로 주목하고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개발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시아의 이 작은 섬나라는 인종적으로도 열등하고,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항공기를 제작할 기술력이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나름대로 기술을 모방하고 발전시켜 중일전쟁에서는 이미 상당한 항공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육군의 Ki-27 전투기와 일본 해군의 A5M 전투기는 193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는 유럽의 전투기들에 비해서 별로 주눅들지 않을 만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엄호하에 육군항공대의 Ki-21 폭격기와 해군의 G3M 폭격기들이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의 A5M. 저익 단엽으로 설계된 함재 전투기였다. 이 전투기도 1930년대 중반의 기준으로는 세계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훗날 제로 전투기 설계의 근간이 되는 기체이다]
한편, 중국의 실정은 실로 엉망이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서 서구의 중고 전투기를 원조 형식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지만 이들을 야전에서 운용할 만한 정비기술력이나 조종사들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부패한 군부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전투기 조종사를 시켜준다면서 장교로 입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많은 뇌물을 받기도 했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금한 후 사적으로 유용했다. 예를 들면 어떤 도시에서 모금한 후 원조받은 전투기 1대를 끌고 와서는 전투기에 '어느 어느 도시의 시민들이 기증한 것'이라는 표기를 하고 기념비행을 실시한 후 곧 다른 도시로 가서는 이전의 도색을 지우고 같은 방법으로 또다시 모금을 하는 방법으로 전투기 1대가 10여 군데의 도시에서 모금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군자금은 병사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군부의 부패한 장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다.
[중국 시가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자행한 주역, Ki 21 폭격기. 일본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 경우 매우 취약했지만 개전 초기의 중국 하늘에는 일본 전투기들에 대항할 만한 중국 공군의 세력이 거의 없어 자기 안방처럼 하늘을 누볐다]
부패하고 무능한 중국군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일본의 항공전력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하나로 똘똘 뭉쳐도 힘들 판에 안에서 썩어가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란 말인가. 당시 중국에 파견되었던 서구의 군사고문관들은 이런 세태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며, 기초 비행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종사들이 전투기를 타고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날아오르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자신의 비행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적과 싸우기도 전에 비행사고로 스스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 지상전에서도 일본 관동군의 공격 앞에 중국군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머리 위에서는 일본의 항공기들이 자기 안방처럼 돌아다니며 폭탄을 퍼붓거나 기총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창녀들까지 몸을 팔아 번 돈을 헌납해 일본 육군항공대에 정찰기를 기증하고 있다는 선전용 사진.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전쟁무기 생산을 독려했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군비를 모금했다]
그러나 일본이 점차로 중국을 광범위하게 침공해 들어가면서 계속 후퇴를 거듭하는 중국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항공기들이 활동해야 하는 범위가 넓어졌고, 야전 비행장도 부족해지고 있었다. 일본 폭격기들은 아군 전투기의 엄호 없이 원거리 폭격 임무를 많이 수행해야 했는데 이 때 몇 대 안 되는 중국 전투기들을 만나게 되면 어느 정도 손실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보다 먼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장거리 호위 전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했고, 이것이 일본 최고의 전투기 A6M 제로를 탄생시키게 된 시대의 요구였다.
여하간 중국의 하늘은 불타오르게 되었고, 일본은 실전에서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항공전력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항공전력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중일전쟁을 통해서 일본의 항공전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많은 조종사들이 실전 경험을 통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은 중국 침공을 시작으로 아시아 제패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이 몇 년 후에 겪게 될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연전연승에 패배를 모르는 무적 일본군의 신화 속에 일본열도 전체가 마치 멈출 줄 모르고 돌진하는 폭주기관차 같이 군국주의의 열풍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Originally updated at May 4, 2001
http://airwar.hihome.com(foxmouse air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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