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별자리/태평양 전쟁 항공전

1부 태양을 꿈꾸던 제국; 2장 중국 하늘의 일장기 #1

iulius 2009. 7. 21. 16:31

== 중경 대공습 ==

[중국 하늘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항공대의 97식 전투기 Ki-27. 최고속도가 시속 460km에 7.7mm 기관총 2정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유의 날렵한 기동성으로 대부분의 중국 전투기들을 능가했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억지트집을 잡아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으로 침공해 들어오면서 일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지상의 중국군을 유린했으나 중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북경, 상해, 남경 등의 도시가 속속 함락되어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혔지만 중국군에게는 도무지 일본군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복엽기의 에이스 진서전과 같은 소수의 영웅적인 조종사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중국 공군은 서류 상에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초빙을 받아 중국 공군의 군사고문으로 취임했던 클레어 센놀트는 중국 공군의 한심한 상황에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서 중국군의 군율이 너무나 엉망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중국 상공에서 맹활약했던 Ki-21 폭격기]


대표적으로 센놀트가 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중국 공군의 상황을 기록한 보고서를 요구했을 때, 그는 그가 받은 서류상에 기록되어 있는 500기의 전투기들이 실제로는 털털거리는 중고기체 91기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황당함에 치를 떨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무도 몰랐으며 어떤 장교들도 책임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대부분의 항공기 구매자금이 부패한 장군이나 장교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서류상에 구매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중국을 구원하기 위해 왔지만... 장개석과 송미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중국 공군의 군사고문으로 위촉된 클레어 센놀트.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황당했다. 결국 그는 희망이 없는 중국 공군의 양성을 포기하고 용병 전투비행대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를 창설하게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중국 공군의 훈련 상태였다. 조종사들은 대부분이 소위 명문 귀족가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중국은 중북부의 도시 낙양에서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는데, 여기에 있던 비행학교는 명문가의 자제들은 무조건 입교를 허락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낙제를 시키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비행기 조종사라는 멋진 직업에 대한 명문귀족들의 동경으로 인해서 서로 자신의 자식을 입교시키려고 교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질 있는 조종사 후보생들은 비행기를 제대로 타지 못했고 함량미달의 조종사가 배출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멋을 내려고 조종사가 된 경우였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나설 용기도 실력도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이들이 날아오른다 해도 일본 전투기들의 상대가 되기는 커녕 만만한 사냥감에 불과할 뿐이었다.

[1938년 중국 공군 중부지구 제14전투비행대 소속의 드와땡 D.510 전투기. 프랑스가 원조한 기체로 중국 공군의 마크인 청천 백일장과 수직미익의 파란 줄무늬가 있다. 본 기체는 훗날 D.520의 모체가 되는 전투기로서 프랑스가 제작한 최초의 저익 단엽 전투기였다. 그러나 최고 속도가 시속 360km에 불과해 Ki-27과 같은 일본 전투기들의 먹이가 되었다]


게다가 중국 공군은 부족한 조종사를 보충하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용병 조종사들을 모집해서 전투기를 몰게 했는데, 이렇게 중국으로 온 용병 조종사 또한 제대로 공중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센놀트가 경험한 가장 어이 없는 상황은 그의 눈 앞에서 시범비행에 나선 중국 전투기들 13기가 이륙 또는 착륙 중에 서투른 조종술로 인해서 6기나 파손된 것이었다. 더구나 이들이 조종해야 하는 전투기들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원조받은 것들로서 무장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부품이 모자라 야전에서의 정비 보수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한심한 문제들이 중국 공군이 처한 상황이었다.

[1937년 항주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군 제25전투비행대 소속의 미국제 커티스 호크 3기. 기수에 쓴 한자는 항일 문구를 담고 있고 동체의 2503은 대대명과 기종별 기호이다. 역시 시대에 뒤떨어지는 기체로서 얼마 사용되지 못하고 대부분 파괴되었다]


센놀트는 이런 끝이 안 보이는 막막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중국을 떠나려고 했으나 장개석과 송미령의 간곡한 청으로 중국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중국 공군의 전투기부대를 훈련시켜 제법 부대다운 부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으나 여전히 일본 항공전력의 양적, 질적 우세 앞에 속수무책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중국 공군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훗날 맹활약을 하게 되는 미국인으로 구성된 용병 전투비행단을 창설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1938년 중경 방어에 나선 중국 공군 제4전투비행대 소속의 I-16. 소련에서 원조받은 기체로서 최고 속도는 시속 460km였으며 경쾌한 기동성을 가지고 있어 일본 조종사들이 가장 까다로운 적기로 평가했던 기종이다. 후에 노몬한에서도 소련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한편,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째로 접어드는 1938년이 되면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관동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장개석은 주요 도시를 모두 빼앗긴 채 국민당 정부를 이끌고 이리저리 도망다녀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일본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되는 중경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일본군 선봉부대로부터 중경까지의 거리는 수백km 였으며, 겹겹이 가로막고 있는 산맥들이 일본 육군의 진격을 차단해 주고 있어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장개석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1938년 가을부터 일본군을 피해 정처없이 떠돌던 중국민들이 이 새로운 도시로 몰려들었다. 겨울이 지나면서부터 중경은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변했다. 군수공장이 가동되었고 학교가 설립되고 정부기관이 대부분 이주해왔다. 중경의 인구는 6개월 새에 본래 인구의 5배가 넘는 100만 명이 되었다.

[일본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면서 중경에 폭탄의 소나기가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곧 중경을 덮칠 거센 태풍 직전의 고요에 지나지 않았다. 안개와 비가 끊이지 않던 중경의 겨울 날씨가 수그러들고 화창한 봄이 찾아오자 일본은 중경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일본군은 1939년 5월 4일 드디어 중경하늘에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켰다. 갑자기 하늘에 검은 점들이 여러 개 나타나고 폭격기들의 소음이 크게 들리자 중경 시민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 순간 귀청을 찢는 듯한 '휘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기 저기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시가는 연기와 먼지로 뒤덮였고, 주로 목조건물로 되어 있던 중경 시가는 지옥의 불길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울려퍼졌다.


대피할 곳도 없이 수십만의 사람들이 밀집해 있던 중경의 주거지구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지역은 주로 대나무로 만든 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소방설비는 전무했다. 이 점을 간파한 일본 폭격기들이 소이탄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중경 시민들은 공습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첫 날의 공습에서 대략 5천여 명의 중경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3년간 계속될 중경 대공습의 시작에 불과했다.

중경대공습의 피해는 1937년 독일의 콘돌 군단이 스페인 내전에서 괴르니카에 자행한 공중 대학살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전혀 대비가 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공포와 혼란을 유발하기 위한 도시 폭격이 독일 공군에게도, 일본군에게도 적국을 제압할 참으로 매력적인 방법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중경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G3M 폭격기. 이들은 전투기의 호위 하에 거의 매일 중경 상공에 나타나 폭탄을 퍼부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여 대만이나 홍콩 등지의 기지에서 중경까지 날아오기도 했다]


일본군의 공습이 계속되면서 중경을 수비하기 위해서 날아오른 일부 중국 전투기들이 일본군에게 맞섰지만 숫적으로도 기량면에서도 일본 조종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 전투기들은 조직적으로 운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교전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그때 그때 출동 가능한 기체들이 몇 기씩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투기들이 벌이는 소규모의 편대전말고는 중국 하늘에서 항공전이라고 부를 만한 전투는 없었다고 봐야한다. 그렇지만 일본 전투기들의 호위가 빈약한 경우에는 중국 전투기들이 일본 폭격기를 상대로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중경의 독일 대사관이 폭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누더기로 기워 만든 대형 제3제국기를 마당에 내걸었다. 아직 독일과 일본이 동맹을 맺기 전이었으나,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독일 대사관은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일본육군과 해군의 조종사들은 이런 만만한 상대들과 교전한 중국 상공의 전투에서 천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실전을 경험하면서 공중전술과 조종실력이 몇 단계나 상승하게 되었다. 마치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기와 요기가 짝을 이루어 서로 엄호하는 독일 공군의 로터 전술과 비슷한 전술을 일본 항공기들도 구사하기 시작했으며 경험이 쌓인 고참 조종사들은 신참 조종사들의 뒤를 엄호하면서 중국 전투기를 신참이 격추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실정경험이 쌓여 일본의 전투기나 폭격기 조종사들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세계최고 수준의 실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938년 중부군 소속으로 활약했던 SB-2 폭격기. 소련이 제공한 기체로서 I-16과 함께 스페인 내전과 중일전쟁에 모두 얼굴을 내밀었다. 일본 전투기들이 상당히 격추시키기 어려운 기체로 평가한 기종이며,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 폭격기 12기로 된 편대가 일본 해군항공대의 한 비행장을 기습하여 100여 기 가까운 항공기를 파괴한 대전과를 올린 적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