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별자리/태평양 전쟁 항공전

1부 태양을 꿈꾸던 제국; 2장 중국 하늘의 일장기 #2

iulius 2009. 7. 29. 13:58


== 항공모함의 시대 ==

한편, 일본 해군은 육군 항공대와는 별도로 항공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일전쟁에서 활약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 미 해군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강력한 해군을 목표로 함선 건조를 시작했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강력한 해군은 일본의 식민지 유지와 외부로 향한 침략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일본은 필사적으로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 산업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일본이었음에도 해군력의 강화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아 수많은 전함을 건조했으며 해군은 일본 육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대한해협에서 벌어졌던 동해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괴멸시킨 영광적인 승리가 두고두고 회자된 덕분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장 지원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전함의 승조원이었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이 실험적으로 함선에서 비행기를 이착륙시키는 데 성공하고 비행기를 운용하는 배 - 항공모함 - 을 최초로 제작했다. 영국은 1918년까지 4척의 항모를 건조하여 세계 최강 대영제국 해군의 성가를 드높였다. 드디어 해군에도 창공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영국이 이렇게 앞서 나가자 이에 자극받은 나라 중에서 역시 해군력을 중요시하던 미국도 1922년 최초의 항모 랭글리를 진수시키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영국이나 미국의 것보다 규모는 작지만 실질적인 항모 호쇼를 진수시키는 큰 도약을 이룩했다. 이후 일본의 해군 관료 중 미래를 내다본 몇몇 사람에 의해서 미래의 전장에서는 항모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1925년에는 일본 해군의 상징인 대형항모 아까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일본은 해군 항공전력을 강화하는 시점에서 영국과 미국에 전혀 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군비를 제한하던 워싱턴 군축조약이 실효되면서 영국, 미국과 거의 대등한 조건으로 해군력을 강화할 수 있게된 일본은 즉시 미 태평양 함대에 맞먹는 전력을 갖추기 시작했고, 아까기에 맞먹는 대형항모 가가와 히류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 해군 내부에서는 여전히 전함의 거포가 미래해전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사상 최대의 전함 야마토와 자매함 무사시를 건조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해군 내에서는 항모를 지지하는 세력과 전함을 지지하는 세력 간에 의견 충돌이 계속된다.

[중국으로 출항하기 전의 항모 아까기. 아까기야말로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시점에서 일본의 항모는 성능 면에서도 미국의 항모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고 계속적인 개수를 통해서 크기는 오히려 미국의 항모보다 더 컸다. 이것은 미국 항모들이 대부분 태평양과 대서양 모두를 활동무대로 예정하고 협소한 파나마 운하를 건너기 위해서 규모의 제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군 정보기관은 일본의 해군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더욱이 일본 해군은 항모가 있더라도 그에 탑재될 항공기의 수준이 서구에 비해서 크게 떨어질 것이므로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항모 기동부대는 중국 해안을 누비면서 미국이 경험하지 못하는 소중한 실전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일본 항모에게 위협이 될만한 중국의 전투함은 거의 없었고, 일본 해군이 중국 해안포대의 사정권을 훨씬 벗어난 거리에서 함재기를 발진시켜 주요 목표물을 강타하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중국의 해안도시들은 일본 해군기에 완전히 봉쇄되고 파괴되었다. 아까기, 가가와 같은 항공모함들은 중국 연안을 마치 자기 안방처럼 누비면서 중국의 해안 도시를 유린했다. 특히, 최고의 훈련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 해군 함재기 조종사들은 선박이나 지상 목표물에 대한 공격능력을 실전을 통해서 배가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장래 막강한 일본 해군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었으며 1940년이 되자 어느새 태평양에서는 일본 해군이 미 해군과 영국 해군을 합친 것보다도 강력한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해군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우수한 함재기의 개발에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중일전쟁을 통해서였다. 당시 영국이나 미국은 항모의 함재기들이 적의 함선이나 함대와 상대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일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함재기들이 종종 공군기와 조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함상 전투기가 적의 공군기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로 적 공군과 공중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A6M 제로 전투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일본 함재기의 수준은 1940년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 노몬한 사건 ==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을 통해서 전술을 완성했다면, 일본군은 중국 공습을 통해서 항공전력의 수준을 몇차원 높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일본 육군 항공대와 해군은 엄호 전투기가 없는 경우 폭격기는 전투기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통감했고, 충분한 엄호 전투기를 붙여서 출격시키기 위해 야전 비행장을 빨리 건설하여 항속거리가 짧은 전투기를 폭격기와 동행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따라 일본 육군이 진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곧 간이 비행장이 건설되어 항공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칠 것이 없던 일본군도 임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노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부분의 전사에 'Nomonhan incident'로 기록되어 단지 사건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일본 육군과 소련 육군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소련과 몽골, 그리고 만주의 접경에서 할라강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소련이 영토 문제로 사소한 충돌을 벌이다가 이것이 양측의 자존심을 건 전투로 확대된 것이다. 물론 노몬한 사건은 1939년 9월 1일부터 16일 사이에 벌어진 육전을 지칭하지만 교전지역 상공에서는 양측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상당한 규모로 전개하여 공중전을 벌였다.

[일본의 전쟁 기록화. 노몬한 사건에서 격추된 일본 조종사가 동료를 구하는 장면이다. 배경의 전투기는 Ki-27로 보인다]


당시 일본의 주력 전투기는 육군 항공대의 Ki-27이었다. 이에 맞선 소련은 I-153 복엽 전투기와 I-16 단엽 전투기를 주로 사용했다. 일본의 항공전력은 이 때 처음으로 대등한 상대를 만났으며 그동안 쌓은 실력을 과시하면서 소련 공군기들을 상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양측은 이 기간 동안 벌어진 공중전에서 서로 더 많은 수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은 일본군이 하늘에서 벌어진 교전에서는 판정승을 거두고 있었다. 일본은 162기를 잃었으나 무려 400기가 넘는 소련기들을 격추시켰던 것이다.

[중국전선과 노몬한 사건에서 활약했던 일본 육군항공대의 2인승 경폭격기 Ki-30. 일본이 최초로 보유한 저익 단엽 폭격기로 중형 폭격기 개념의 Ki-21과는 달리 지상군에 대한 근접 지원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지상전에서는 훗날 독일과의 전투에서 소련을 구한 명장 쥬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이 일본군을 압도하며 패퇴시켰다. 일본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사용한 경무장, 경장갑의 한세대 떨어지는 장비를 사용한 반면, 소련은 소형 전차들의 집단 운용과 대규모 야포사격을 통해 일본군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일본은 만세 돌격과 같은 용감한 행위만으로는 기계화된 군대에 이길 수 없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 지역을 소련에게 내주고 물러섰다. 이 때 일본은 약 2만 5천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소련군이 일본군이 다루기에는 힘겨운 상대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는 더 이상 북쪽으로 영토 욕심을 내지 않았다. 소련군도 이 때의 승리에 만족하여 더 이상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으며, 이 전투는 곧 양측이 쉬쉬하는 작은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버렸다.

[중국 하늘을 장악한 일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 조종사들이 비행장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배경으로 보이는 폭격기는 Ki-30이다]


비록 지상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노몬한 사건을 통해서 일본은 항공전력이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게다가 일본은 중일전쟁과 노몬한 사건을 통해서 발견한 그들의 항공기의 단점을 개량한 신예기들을 속속 배치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일본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더욱 안하무인격이 되어 아시아 정복을 통한 대제국의 건설이라는 야욕을 구체화하고 있었고 일본에는 군국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누구도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 미국과의 전쟁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Originally updated at May 1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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