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별자리/태평양 전쟁 항공전
1부 태양을 꿈꾸던 제국; 3장 공격목표는 진주만 #1
iulius
2009. 8. 11. 15:56
== 일본, 대도박을 결심하다 ==
1941년 8월 일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 대장 도죠 히데끼를 필두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지도를 펴 놓고 은밀하게 야심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전 유럽을 흔들어 놓자 일본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100여 년 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식민지화한 후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본국이 점령당함에 따라 식민지 관리를 위한 군사적인 능력을 상실했으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태로 독일의 침공에 맞서서 본토 방위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식민지 관리에는 여유가 없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로 성장한 일본은 아시아의 자원지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인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때맞추어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자 동남아의 자원지역이야말로 일본에게는 임자가 없이 방치된 먹음직스런 고깃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으며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서 일본이 나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아시아의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이무렵 일본은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광대한 식민지 유지와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이 점차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석유가 큰 문제였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을 통해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석유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것이다. 1941년 8월을 기점으로 일본이 비축하고 있는 석유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8개월 분량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수치였다. 석유야말로 전쟁 수행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일본군은 점점 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시로 매일 규모가 커지던 일본 해군의 경우, 군함과 함재기가 소모하는 석유량은 하루 400톤을 넘었다.
한편, 유럽과 중국 등의 어떠한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태평양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1940년 7월, 기존의 해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1940년 현재 일본 해군 전력에 대해 7:10으로 근소하게 우세한 미국의 해군 전력을 1943년까지는 5:10, 1944년까지는 3:10으로 벌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7:10의 우위라고 해도 미 해군이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뉘어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태평양만 놓고 본다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볼 때 이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져 조만간 일본 해군을 숫적으로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미국은 1939년 루즈벨트의 은밀한 명령으로 1940년 5월 이전에 일본에 대한 견제와 군사력 과시를 위해서 전통적으로 미 해군기지인 샌디에이고에 주둔하고 있던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로 이동 배치하도록 했다. 이로서 미 태평양 함대는 일본의 목전까지 와 있게 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미의회에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만행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자, 미의회의 여론은 점차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석유를 비롯한 필수물자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자들은 난감해졌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니 많은 인명 손실과 전쟁 물자를 쏟아부은 중국전선에서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석유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미국은 사사건건 일본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으로 보였다. 1941년 7월, 일본이 제25군을 이동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지역을 점령했을 때, 미국이 즉시 철수를 요구하면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는 대응을 통해 이러한 일본의 우려는 분명해졌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압력에 치욕적으로 굴복하기보다는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려면 천
연자원이 풍부한 동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여 석유를 포함한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계획에서는 하와이로 전진 배치된 미 태평양 함대가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사실상 필리핀에 주둔 중인 미군은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일본군에 위협적이지 않았으므로 하와이의 미 해군만 없다면 일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 군대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영국군도 별 위협이 되지 않는데 미국의 태평양 함대만이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는 위치에서 눈엣가시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미 태평양 함대의 하와이 전진 배치는 목에 들이댄 칼과도 같은 위협이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에게 계속 침략 전쟁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철병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을 파기하지 않는 한 경제봉쇄는 계속될 것이라고 미국의 헐 외무장관은 큰소리 치고 있었다. 일본의 외무대신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비공식적인 무기 지원을 중단하고 석유 수출을 재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일본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 성명으로 맞섰다.
== 일본, 대도박을 결심하다 ==
1941년 8월 일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 대장 도죠 히데끼를 필두로 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지도를 펴 놓고 은밀하게 야심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독일이 승승장구하면서 전 유럽을 흔들어 놓자 일본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100여 년 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식민지화한 후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본국이 점령당함에 따라 식민지 관리를 위한 군사적인 능력을 상실했으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태로 독일의 침공에 맞서서 본토 방위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식민지 관리에는 여유가 없었다.
[유럽인들에 의한 동남아시아 지배가 절정에 달하던 무렵의 상징적인 사진. 파티에 참석하려던 프랑스 장교가 왜소한 현지 원주민에게 업혀서 도랑을 건너고 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지배자를 노리는 일본군의 침공으로 유럽인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로 성장한 일본은 아시아의 자원지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인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때맞추어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자 동남아의 자원지역이야말로 일본에게는 임자가 없이 방치된 먹음직스런 고깃덩어리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으며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서 일본이 나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아시아의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이무렵 일본은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광대한 식민지 유지와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이 점차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석유가 큰 문제였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을 통해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석유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것이다. 1941년 8월을 기점으로 일본이 비축하고 있는 석유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8개월 분량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수치였다. 석유야말로 전쟁 수행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일본군은 점점 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시로 매일 규모가 커지던 일본 해군의 경우, 군함과 함재기가 소모하는 석유량은 하루 400톤을 넘었다.
[대동아공영권. 아시아를 일본의 지배 하에 두겠다는 야욕을 볼 수 있다]
한편, 유럽과 중국 등의 어떠한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태평양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1940년 7월, 기존의 해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1940년 현재 일본 해군 전력에 대해 7:10으로 근소하게 우세한 미국의 해군 전력을 1943년까지는 5:10, 1944년까지는 3:10으로 벌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7:10의 우위라고 해도 미 해군이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뉘어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태평양만 놓고 본다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볼 때 이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져 조만간 일본 해군을 숫적으로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미국은 1939년 루즈벨트의 은밀한 명령으로 1940년 5월 이전에 일본에 대한 견제와 군사력 과시를 위해서 전통적으로 미 해군기지인 샌디에이고에 주둔하고 있던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로 이동 배치하도록 했다. 이로서 미 태평양 함대는 일본의 목전까지 와 있게 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미의회에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만행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자, 미의회의 여론은 점차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석유를 비롯한 필수물자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자들은 난감해졌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니 많은 인명 손실과 전쟁 물자를 쏟아부은 중국전선에서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석유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미국은 사사건건 일본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으로 보였다. 1941년 7월, 일본이 제25군을 이동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지역을 점령했을 때, 미국이 즉시 철수를 요구하면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는 대응을 통해 이러한 일본의 우려는 분명해졌다.
[미국의 압력에 대한 일본의 선택. 1940년 삼국동맹을 기념하여 도쿄 긴자에 나부끼는 추축국의 국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압력에 치욕적으로 굴복하기보다는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려면 천
연자원이 풍부한 동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여 석유를 포함한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계획에서는 하와이로 전진 배치된 미 태평양 함대가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사실상 필리핀에 주둔 중인 미군은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일본군에 위협적이지 않았으므로 하와이의 미 해군만 없다면 일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 군대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영국군도 별 위협이 되지 않는데 미국의 태평양 함대만이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는 위치에서 눈엣가시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미 태평양 함대의 하와이 전진 배치는 목에 들이댄 칼과도 같은 위협이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에게 계속 침략 전쟁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철병하고 독일, 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을 파기하지 않는 한 경제봉쇄는 계속될 것이라고 미국의 헐 외무장관은 큰소리 치고 있었다. 일본의 외무대신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비공식적인 무기 지원을 중단하고 석유 수출을 재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일본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 성명으로 맞섰다.
"이제 일본은 막 외부로 뻗어나가려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발전 단계의 나라가 그 이웃나라를 괴롭히지 않은 예가 있었는가? 미국인들은 자신을 돌아보라!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멕시코인에게 물어보라! 미국인들이 얼마나 잔혹한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었는가를..."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에 대해서 전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심리적으로 일본은 얕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을 위협만으로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본이 치욕스럽게 느낄 만한 외교적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이고 단호한 태도는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일본에게 더 이상 미국과의 교섭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군국주의자들에게 이제는 치고 나가느냐, 아니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냐는 선택만이 남아있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