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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의 미해군기지를 기습공격하였다. 미국이 입은 피해의 양적 측면에서 공습은 대성공이었지만 질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진주만에 주둔하던 미 항공모함은 모두 훈련 또는 작전 중이어서 공습의 피해를 모면했고, 3차 공습의 불발로 상당수의 군용물자가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일본은 중국, 인도차이나, 싱가폴을 넘어 뉴기니 섬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에서 연합함대 주력이 완패하며 사실상 승전의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쇼와 16년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이 아니라 1941년이다. 그 해 8월 23일, 총리대신 직할 총력전연구소의 모의내각은 연습(simulation)결과 (1) 인도네시아 등 남방 유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경우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할 수 없으며 (2) 이는 국력이 허하는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총사퇴하였다. 패배를 예측한 연습결과는 27일과 28일, 실제 내각 앞에서 발표되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제한적이면서도 의외로 넓다. A.J.P. Taylor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과 비교하여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파리 강화조약으로부터 출발하여 전간기(戰間期) 외교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갈등요소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것이 형성되었으며 전쟁으로 이어졌는지를 모두 다루고 있는데 반해, <쇼와16년 여름의 패전>은 갈등요소의 형성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책의 저술목적에 따른 차이라고 보이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이 전쟁 원인을 히틀러에게만 돌리려는 흐름에 대한 반박을 목적으로 했다면 <쇼와16년 여름의 패전>은 개전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진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 수 없었던 당시 일본제국의 국가 의사결정 체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의내각과 이 연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본제국의 의사결정 체계를 간략히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의 제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운영권을 통수권과 국무권으로 양분하였다. 통수권은 통수부를, 국무권은 정부를 통해 행사되는데 1941년 당시 통수부는 대본영이었고, 정부란 내각 각의를 지칭했다. 대본영은 참모본부(육군부)와 군령부(해군부)로 구성되어 있고 내각 각의는 총리대신을 중심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제국의 군부는 대본영과 내각의 육군성 및 해군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원화된 기관 간의 의사결정을 위해 연락회의라는 것이 존재하며, 일왕의 배석 하에 어전회의가 열린다. 관례적으로 어전회의에서 안건에 대해 일왕의 발언권은 없었다. 문제는, 통수권의 헌법적 지위에 있었다. 제국헌법은 통수권을 이른바 '천황의 대권'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정부는 통수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은 통수부 즉, 대본영이었다. 결국 제도적으로 정부가 군부를 통제할 수 없는 구조였던 셈이며 이것이 일본 군국주의의 제도적 배경이었다. 1941년 여름 내내 대본영과 내각은 개전 의사결정을 놓고 대립했다. 강경론자인 외무대신을 내각에서 배제하기 위해 내각이 총사퇴를 하는가 하면, 대본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육군대신을 총리대신으로 칙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적 문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고 대본영 참모본부가 주장하는 '즉시 개전'이 최종적으로 승인되었다. 대본영 군령부는 이러한 전제 하에 미국에 최대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진주만 기습작전을 세웠고, 내각은 오로지 전세를 유리하게 할 목적의 외교만을 수행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상은 전적으로 책의 내용에 기반함)


총력전연구소의 연습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재현했다. 연구생이 모의내각을 구성하였고, 연구소원이 모의대본영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연습 전체를 총괄지휘했다. 모의대본영이 연습의 전제가 되는 정황을 모의내각에 전달하면, 모의내각은 그 정황 하에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다시 모의대본영에 통보하는데 그 전체의 지휘를 모의대본영과 동일한 개체가 수행한 것이다. 즉, 모의내각이 정황을 주도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모의대본영의 의지 하에서만 의사결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연습기에서 모의대본영은 '영국과 미국의 수출 금지조치로 경제봉쇄가 현실화 되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등 남방 자원을 무력으로 확보한다'는 전제를 제시하였다. 모의내각은 토의를 거쳐 해당 전제는 필연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으로 연결될 것이며, 이 경우 전쟁의 장기화와 물량의 부족(총력전의 정의에 따르면 국력의 차이는 전쟁수행능력의 차이이다)이 예상되고 유럽전쟁의 구도를 고려하면 미국과 소련의 군사협력이 예견되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모의내각의 결론은 '남방 자원의 무력 확보'라는 전제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모의대본영은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으로 연습이 종료된다는 이유로 모의내각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의내각이 개전 결심을 하지 못하자 모의대본영이 독자적으로 상황을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모의대본영은 이미 정해진 대인도네시아 행동을 극력 앞당겨서 결행할 것이 요망된다."

"모의대본영의 대인도네시아 행동 준비는...(중략)... 11월 중순에는 응급 준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모의내각의 외무대신은 "대본영이 마음대로 작전을 개시하려 한다면 그것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양해를 미국과 영국에게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대신은 "여기까지 정황이 진전된 이상 개전은 불가피하므로 가장 좋은 호기를 파악하여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평파인 두 사람 역시 모의대본영의 의사를 뒤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모의내각은 모의대본영의 대인도네시아 군사작전에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낸다. 이에 대해 모의대본영은 '미국이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경제 및 외교의 단교를 요구한다'라는 추가정황을 제시하였다. 다시 한 번 모의내각은 "이 경우에도 개전은 불가하다"고 통보하였으나 모의대본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습 상에서 미국과 전쟁이 개시되었다.


전쟁이 개시되자 물자, 특히 석유의 부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유럽에서의 독소전 고착에 따라 동맹국인 독일이 대소련 참전을 요구해 왔다. 외무대신은 소련과의 중립조약을 위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소련을 지원하거나 소련영토를 통해 일본을 압박할 정황이 포착되었다. 모의내각은 이를 헤쳐나갈 어떠한 정책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모의내각은 '국력이 허하는 바가 아니라는 견해'와 함께 총사퇴를 함으로써 연습의 막이 내렸다. 이것이 1941년 8월 23일의 결정이며, 책의 제목인 쇼와16년 여름의 패전이다. 연습이 실제를 정확히 예측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헌법에 따른 대본영의 내각에 대한 우위 하에서는 미국과의 개전은 불가피 하다는 것, 그리고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패배하리라는 것을 보여준 점에서 모의내각 연습은 상당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내용 자체가 물론 개인적으로 관심있어 하는 주제였지만, 읽은 직후의 감상은 오히려 주제 외의 것이었다. 총력전연구소의 모의내각이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에 대한 놀라움이다. 총력전연구소는 1940년 10월, 문자 그대로 총력전을 연구하기 위하여 개소했다. 소장은 현역 육군 중장인 이무라였고, 연구소원은 서기관급의 문관 5명과 육군대령, 해군대령 각 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 하에 1년간 연구활동을 하게 될 연구생 36명은 군, 관, 민에서 추천받은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연구생의 평균연령은 33세.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렸을 1941년의 일본에서 30세 초반의 젊은이들이 총리 직속의 연구소에서 모여 '개전 시 패배'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무관보다 문관이 더 많은 인사구성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최소한 이들이 오로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였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 상황에서 카산드라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들 유능한 인재였기에 자신의 지식과 양심이 동의하지 않는 결론에 그저 장단맞추기로 합의하는 것을 거부하였을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기업의 차장, 부장들이 오로지 자신의 편협한 경험에 기반하여 상황상황에 따라 내뱉는 말들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신성(!)한 진리처럼 포장하기 위해 밤을 새서 그 말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찾아내는 컨설팅 업무를 종종 경험했던 나로서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실제로 개전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하게 고려된 요소는 석유였다. 대본영 군령부는 "이렇게 갑론을박 하는 상황에도 기름은 한 시간에 400톤씩 줄어들고 있다"며 내각을 압박했다. 그들은 즉시 개전시 30개월, 3개월 후 개전 시 21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제시했다. 기획원에서는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는 경우 향후 3년간 석유수지가 (+) 70만 톤일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인도네시아 이외에 석유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그 요구대로 중국에서 장개석 정부를 인정하고 철병해야 했다. 중국에서 철병하는 것은 육군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내각이 선택할 수 있는 답지는 이미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1942년 인도네시아 유전을 점령했다. 그러나 유전 점령에 따른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태평양에 대한 제해권을 상실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석유가 생산되지만 이를 수송할 방법이 없어 심지어 석유가 든 고무통을 바다에 띄워 일본에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만약, 기획원이 인도네시아의 점령에 따른 석유 확보의 효과를 "생산" 관점이 아닌 "보급"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어땠을까? 내각은 '전쟁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찌 되었든 결국 대본영의 의사대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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