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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나는 산이나 행랑채에서 천자문을 익히고 애기씨는 사당에서 사서삼경을 독학하셨다. 그 무렵 사랑채에는 수시로 손님들이 드나드셨다. 애기씨께서는 낮에는 공부하시고 밤에는 마님께 자수며 요리를 배우셨다. 나는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하고 공부하고 밤이면 바느질하는 어머니 곁에서 말동무를 하며 머릿속으로 낮에 공부한 한자를 떠올렸다.
"요새 애기씨 혼담이 오가는 것 같더라. 대감마님이랑 같은 당파에 계신 분 아드님이시라든데. 애기씨보다 몇 살 많으시댔더라?"
"어머니, 애기씨는 시집 안 가세요."
그때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때의 나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기씨께서는 시집 안 가시고 벼슬 하실 거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다.
"애기씨께서 시집 안 가신다던? 아이고야, 아직도 어린애시네. 우리 범이는? 우리 범이는 언제 장가들래?"
어머니는 내 말을 가볍게 들으셨는지 웃으셨다. "저도 장가 안 들어요."하려다가 나는 제풀에 놀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머니의 질문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은 행랑채에서 자식 낳아 기르며 산에 나무하러 다니는 내 모습이 아니라 대감마님처럼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는 내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사람은 지 분수껏 살아야지 안 그럼 탈이 나는 법이야."했던 게 생각났다.
다음날 산에 다녀와서 천자문책을 애기씨께 쓱 밀어두고 돌아서려니까 애기씨께서 날 잡으셨다. 각자 공부하느라 못 뵌 새에 키도 조금 더 크시고 얼굴윤곽도 더 또렷해지시고 입술도 한 일(一)자로 단정해지셨다.
"네 이름은 한자로 뭐야? 성은 순박할 박(朴)에, 범은 무슨 범이야?"
"모르겠는데요."
"넌 글자 배울 때 네 이름자도 안 찾아봤어? 궁금하지도 않았어?"
내 이름 '범'은 호랑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호랑이 꿈을 꾸고 날 낳았대서 이름을 '범'이라 했다. 머슴 이름이 호랑이라니. 머슴 이름치고는 너무 거창한 이름이라서 어디 가서 말하기도 민망한 이름이었다.
"애기씨 이름자는 뭔데요?"
"뜻 없어."
늘 '애기씨', '막내 애기씨'로 불렸던 애기씨의 이름은 '한서운'이었다. 딸로 태어난 게 서운하대서 이름도 '서운'이었다. 어차피 시집가면 당호를 붙이거나 택호로 불리고 죽으면 '안산 한씨'로 남을 거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냐 해서 대충 붙인 이름이랬다.
"네 이름자는 뭐냐고."
"저도 뜻 없어요."
"그럼 넓을 범(汎)으로 해. 물 위에 떠서 돌아다닌다, 넓다, 물 위에 뜬다는 뜻이 있어. 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자유롭게 넓은 세상에서 널리 뜻을 펴면서 살아."
내가 초노가 된 건 산짐승을 이름에 넣어서라고 부모님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지만 호랑이는 산중의 제왕이고 나는 사람 중에 제일 낮은 천민이었다. 사람은 이름하고 반대로 살게 되는 것 같다.
"이름자 마음에 들어?"
"네."
"그럼 내 이름은 뭘로 해 줄래?"
"애기씨 이름을 제가 감히 어떻게 지어요?"
"너, 공부 계속 할 거지? 천자문 뗐으니까 인제 나랑 같이 공부해야지."
애기씨는 내가 '아니요'라고 할 리 없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내 말없음을 동의로 받아들이셨는지 애기씨께서 내 얼굴을 마주보셨다.
"인제부턴 나한테 '서운이'라고 부르고 반말해도 돼. 너랑 나는 글동무니까. 자, 내 이름자는 뭘로 해 줄 거야?"
"사, 상서로울 서(瑞)에 구름 운(雲)."
"상서로운 구름. 좋은 징조네."
사람은 이름과 반대로 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그때 '상서로울 서(瑞)' 대신에 '서녘 서(西)'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는 서쪽에 서방정토가 있어서 착한 사람은 죽으면 서쪽으로 간댔다. 나는 서운이에게 '서녘 서(西)'를 주고 서운이는 내게 '평범할 범(凡)'을 주었어야 했을까.
나는 애기씨를 '서운이'라 불렀다. 천출이에게 "천출 주제에!"라고 소리를 지르시고 서얼도 벼슬할 수 있다는 말에 사랑으로 달려가셨던 애기씨께서 내게 글동무로 지내자고 하셨을 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지가 아릿하게 마음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서운이와 나는 사당 뒷마당에서 대숲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책은 주어진 한계에서 벗어나지 말라고도 했고 누구나 공부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머슴은 성인이 되어도 산에서 나무나 해야 하고, 부녀자는 성인이 되어도 집안일이나 하고, 양반 사내들은 성인이 아니어도 밖에 나가 벼슬하란 얘긴가 보지."
"홍계월은 나라를 구했잖아."
내 위로에 서운이가 씩 웃었다. 서운이도 내게 머슴이 나라 구하는 얘기를 해 주고 싶어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나중에 내가 하나 써 줄게."
서운이는 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서운이와 내가 함께 붙어 앉아 책을 읽는 동안 안채의 오동나무는 잎을 떨어 뜨렸고 나는 수시로 마당을 쓸어야 했다. 안채에서 서운이가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나는 오동잎을 쓸다가 둘이서 사당에 가면 사당엔 댓잎이 푸르러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사당에 있는 동안에는 서운이의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채에서 오가는 혼담을 사당에서 막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서운이 시집갈 때 쓸 원앙금침에 수를 놓았다. 비단에 금실은실로 수를 놓은 금침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어머니, 이게 이렇게까지 사치스러울 필요 있어요? 듣기로 군자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는데."
"네가 어미 맘을 어떻게 알겠니. 시댁에 안 처지게 하고 싶어서만 혼수를 호사스럽게 하겠니. 인제 남의 집 사람 되는 내 딸내미, 보고 싶어도 맘대로 못 볼 내 딸내미, 마지막 해 줄 수 있을 때 뭐든지 다 해주고파서 할 수 있는 건 몽땅 다 해주는 거지. 아이구, 우리 마님, 애기씨도 시집 보내시믄 허하고 적적해서 어찌 사시나."
== 가체 ==
2009/07/09 - 가체; #6
2009/04/13 - 가체; 소개하기에 앞서
2009/04/14 - 가체; #1
2009/04/17 - 가체; #2
2009/04/20 - 가체; #3
2009/04/24 - 가체; #4 (You're here)
2009/04/28 - 가체; #5
2009/07/10 - 가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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