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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서운이가 보여줄 게 있다고 나를 불렀다. 서운이의 방문이 열리자 방구석에 검고 윤기 나는 가체가 놓여 있었다. 다리가 열 개 넘게 들어간 듯했다. 저 정도면 소 몇 마리 값, 몇 백 냥은 족히 넘음직했다. 검고 윤기 나고 탐스럽게 염색한 머리카락들을 팔뚝만한 굵기로 밧줄처럼 땋아 둥글게 돌려 세 층을 올리고 뒤로도 먹구름 같은 머리채를 풍성하게 땋아 젖혔다. 검고 거대한 가체에는 동황색 웅황판이며 비단에 진주를 단 진주수며 구리에 초자를 입힌 법랑잠을 달아 장식했다. 중인 집으로는 열 채, 행랑채로는 몇 백 채 값은 될 듯했다. 가난하고 가난한 집 아낙들이 굶다 못해서 최후에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말을 못 들은 척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고 내다 판 머리카락을 붉은 물감, 벌꿀, 송진, 소금, 참깻묵, 숯, 참기름 녹반을 넣어 끓인 염료로 염색해야 가체를 만들 수 있었다. 저 화려하고 웅장한 가체 머리카락 올올이 그 머리카락을 내다 판 아낙네들의 한숨과 눈물이 서려 있을 것이다. 그런 가체를 머리에 이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시집가면 이고 살아야 할 가체야. 꼭 검은 구렁이가 또아리 튼 것 같아서 무섭지 않아?"
"구렁이라 그러니까 생각난다. 구렁이는 '업'이라더라. 구렁이가 집안에 있는 동안은 집이 잘 돌아가지만 구렁이가 떠나면 그 집안은 망해 버린대."
"그렇지도 않아. 검은 구렁이는 한 번 들어오면 죽거나 내쫓기기 전엔 그 집을 절대 떠날 수 없고 그 구렁이가 죽으면 금방 또 새로운 구렁이를 들여. 그러면 집안은 망하지 않아."
서운이는 가체를 들어다 자기 머리에 얹었다. 무겁고 큰 구렁이가 서운이의 머리 위에 또아리를 틀었다. 서운이 머리보다 몇 배는 더 큰 쿠렁이가 금방이라도 서운이를 칭칭 감아서 삼켜 버릴 듯했다. 서운이는 큰 칼을 쓴 죄인마냥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걸 쓰고서 오경이면 일어나서 시부모님께 문안을 드려야 한대. 그게 예를 갖추는 거래."
난 생각해 오던 것을 입 밖으로 내야 한다고 느꼈다.
"시집가실 때 절 교전노로 데려가겠다고 마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내 갑작스러운 존대가 이상했는지, '교전비'도 아닌 '교전노'란 말이 이상했는지 서운이가 가체를 내려놓다 말고 나를 빤히 보았다.
"따라가서 지금처럼 몰래 책심부름이나 하려고요."
"그 집에서도 같이 책 읽게?"
"아니오."
이 집에 계속 있으면 분수 넘게도 공부를 하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좁은 안채를 벗어나서 벼슬을 하고 싶다던 서운이도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는데 나라고 공부를 계속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송충이가 꽃을 먹을 수 없듯이 종놈이 글을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책을 놓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서운이가 시집을 가서도 책을 읽고 글을 지을 수 있다면 나는 책심부름이나 몰래 해다 주며, 심부름 가서도 책을 읽고 글을 지을 수 있다면 나는 책심부름이나 몰래 해다 주며, 심부름 다니는 길에 조금씩 책을 넘겨보며 그걸로 만족하고 평생 머슴으로 살 작정이었다. 하지만,
"너는, 머슴으로 살 수 있어?"
막상 그 말을 듣자 말문이 탁 막혔다. 한 번 글을 배우면 다시는 글을 배우기 이전처럼 살 수는 없게 된다.
"애기씨도 시집 가셔서 대갓집 며느리로 사실 거잖아요."
"난 시집 안 가. 난 안채에만 갇혀 살지 않아. 저자를 자유롭게 나다닐 거야."
<예기>에서 이르길 혼인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성(姓)이 결합하여 위로는 제사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손을 두는 일이라고 했다. 서운이 혼자 가지 않겠다고 버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서운이는 자신이 대갓집 며느리로 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집가서 '안채에만 갇혀 살기' 전에 저잣거리를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지금 같이 밖에 나갈래?"
"지금? 어떻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서운이 옷을 지으면 한 번씩 내게 입혀 보곤 했다. 내가 그 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 서면 어머니는 그 옷이 내 옷인 양 "아이구, 곱기도 해라"하고 좋아하곤 했다. 내가 자라 '사내애 태가 나서' 서운이 옷을 입어 보지 못하게 된 것을 어머니는 무척이나 섭섭해 했다. 그게 계집아이 옷을 못 입혀봐서인지 새 옷을 못 입혀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 서운이의 새 옷을 입어보고서 좋아했는데 서운이에게 내 땀내 밴 옷을 입히니까 어쩐지 민망했다. 다행히 서운이는 밝은 날 가마도 쓰개치마도 없이 팔을 휘두르며 걷는 게 좋은지 내 옷을 거리낌 없이 입고 여긴 어디야 저긴 어디야 물어보며 거리를 활보했다.
"둔여차기천승혜 제옥대이병치 가팔룡지완완혜 재운기지위사 억지이미절혜 신고치지막막 주구가이무소혜 료가일이유악 척승황지혁희혜 홀림예부구향 문붕비여마회혜 권국고이불행(나는 천대의 수레를 몰아 옥으로 만든 수레바퀴를 나란히 줄맞춰 달리네 수레 끄는 여덟 마리 용이 꿈틀거리고 수레의 구름깃발 뱀처럼 펄럭이네 마음을 억누르고 속도를 늦추어도 정신은 높이 솟아 멀어져만 가네 구가를 노래하고 순임금 적의 춤을 추며 잠시 날을 빌어 즐기네 햇빛 휘황한 하늘로 올라 즐기다가 문득 옛 고향을 흘끗 보니 글벗도 슬퍼하고 내 말도 고향을 그리워하여 뒤돌아보며 나아가지 못하네)."
'혜' 자를 세게 하여 초사를 읊는 서운이는 조금 과하게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처럼.
"서운아, 이제 그만 들어가자."
"아직 안 돼. 이쪽 골목 지리를 아직 다 못 익혔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서운이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지리는 익혀 뭐 하게? 얼른 돌아가기나 하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구."
"나 시집가는 날 혼수패물 싸들고 가출할 거야. 그날은 낯선 사람도 많고 바쁘고 정신 없어서 몰래 빠져 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가출해서 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살 거야. 노비들 도망가서 평민으로 사는 것처럼."
지금 사는 집 행랑채에서는 머슴으로밖에는 살 수 없을 것이다. 떠나야만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가출할 때 날 길동무, 글동무로 데려가 줘."
서운이의 혼삿날이 다가올수록 혼수목록에 완결표시가 늘어갔다. 오동나무는 통영까지 내려갔다가 오색으로 빛나는 자개장이 되어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혼례 때 서운이가 입을 옷을 속곳까지 다 새걸로 지었다. 분홍빛 속적삼은 나쁜 일은 빠져 나가고 시원한 일만 있으라고 겨울에도 모시로 만들고 활옷은 포근하고 따뜻한 일만 있으라고 여름에도 솜을 넣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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