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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습관처럼 찾던 적이 있었습니다. 뭔가 메시지를 발견하면 좋은 영화를 봤다는 생각이 들고 메시지를 찾지 못하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라면서 수준 낮은 영화라고 생각했었지요. 영화에는 반드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물론, 영화에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영화마다 모두 다를 수 있는 것 뿐이죠. 대형 블록버스터와 추리영화, 공포영화, 코믹물을 모두 하나의 기준에 맞춰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요. 저 때는 저는 코믹물이나 공포영화를 보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정도의 감상 밖에는 갖지 않았었지요.
그런가하면 같은 영화인데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대중 예술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이 '친구'의 전반에 깔려 있는 모티브는 동성애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하셨는데, 저는 영화를 본 직후에 '이게 무슨 친구냐, 배신이지'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영화 제목인 '친구'는 저한테 있어서 준석(유오성 분)과 동수(장동건 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고 교수님에게는 준석(유오성 분)과 상택(서태화 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던 것이지요.
심지어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해석이 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영화가 한 둘은 아니지만, 특히나 러브레터는 그 중에서도 기억이 많이 나는 영화입니다.
러브레터를 처음 본 것은 1998년 겨울이었습니다. 강남역에 있는 시티극장인가요,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7번 출구쪽에 파고다 어학원 건물에 있는 극장이었습니다. 마침 눈도 내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가 막 일본 영화가 한국에 상륙하던 시기였는데, 일본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워낙 아름다운 영상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고 그걸 기대하고 갔던 거였습니다.
눈 덮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두 시간 가량 보고 나오면서 했던 생각은 영상은 정말 이쁜데 대체 뭔 내용인지 모르겠다 였습니다. 일단, 주연배우가 1인 2역을 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 사람이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헷갈리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고 편지를 주고 받고 하는 내용들이 머리 속에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는게 문제였지요. 뭔가 사랑과 관련된 영화이긴 했는데 그 흐름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면서 그저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위 - 후지이 이츠키, 아래 - 와타나베 히로코]
결국 러브레터에 대한 첫 감상평은 '화면은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뒤집어 얘기해서 화면 말고는 볼 게 딱히 없는 영화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일 년 쯤 후에 다시 러브레터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내용만큼은 제대로 알고 보았지요. 러브레터를 본 분들이라면 (보지 않은 분들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장면, 와타나베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가 죽은 산에 가서 "잘 지내고 계시나요(お元気ですか)"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흐르더군요. 첫 눈에 반했다며 자신에게 다가와서 결혼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죽은지 이 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첫 사랑과 닮아서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히로코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난데없는 편지를 받고 한참 고민한 다음에서야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남자애가 학창 시절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던 이츠키에게 분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을 첫 사랑 대신으로 곁에 두었던 이츠키에게 미운 마음이 들었을까요. 어쨌든 와타나베 히로코에게는 남자친구의 죽음 만큼이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 저의 감상평은 바뀌었습니다. 아니, 바뀌었다고 하기는 그렇군요. 여전히 감상평은 '화면이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영화였다면, 이제 어떤 내용인지는 알겠다 싶은 정도라고 할까요. 왜 '잘 지내고 계시나요' 장면 뒤에 후지이 이츠키의 옛 학창 시절 장면과 후배들이 찾아오는 장면들이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고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는 느낌이 추가되었지요. 러브레터의 범주는 '그저 예쁜 영화'에서 '산만한 예쁜 영화'로 옮겨 갔죠. 뭔가 복수 같은 거라도 하고 싶을 텐데, 이미 죽어버렸으니 복수할 길이 없네 따위의 생각으로 와타나베 히로코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는 더 보고 싶은 영화의 범주에서도 빠져버렸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았는데 그 다음은 뭐 어쩌라구 식으로 끝나는 영화를 굳이 다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세 번째 이 영화를 접하게 된 건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대중 예술의 이해' 시간이었죠.
교수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러브레터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장면은 '오겡끼데스까'일 텐데, 이 장면과 완전히 대칭되는 장면이 어느 장면이냐고 물으셨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저렇게 소리지르는 장면이 또 있었나?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힌트를 주시더군요. 학창시절의 장면에서 남자애가 전학을 가고 나서 여자애가 도서실에 책을 꽂아 넣은 직후에 나오는 장면은 기억나느냐구요. 그제서야 여기 저기서 대답이 나왔습니다. 혹시, 그 커튼 흩날리는 장면? 아... 그렇죠.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여자애가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는데 항상 남자애가 서서 책을 읽고 있던 그 창가에, 빈 창가에 흰 커튼만이 흩날리는 장면이 있었죠. 근데 그 장면이 왜 대칭이 되는거지?
당연히 그 장면은 대칭이 아니었습니다. 힌트에도 불구하고 모두 틀린 답을 말한 거였습니다. 질문의 답은 커튼 장면 바로 뒤에 나오는 약 2초 밖에 안되는 짧은 신, 여자애가 나가면서 도서실 문을 닫는 장면이었습니다.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런 장면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알고 본 후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장면이었지요.
"앞에 장면에서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울면서 잘 지내냐고 묻잖아. 잘 지내겠지. 힘든 게 자기가 힘들지 죽은 사람이 뭐가 힘들겠어. 저건 잘 지내냐고 묻는게 아니라, 나도 이제 잘 지내겠다고 얘기하는 거라고. 이제 마음 속에 있던 남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이란 말이야. 한참을, 크게 사랑했으니까 저렇게 울면서 오랫동안 소리치는 거라고. 근데 이 장면 봐. 조용하고 짧지. 그 전에 창가 한 번 쳐다본 게 다야. 근데 얘도 남자애를 좋아했던거야. 조용하고 아무도 모르게 살짝 살짝 쳐다만 보면서. 그니까 마지막에 그 남자애가 있던 자리를 쳐다만 본 거라구. 히로코랑 남자애 사이에는 둘 다 아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니까 마지막으로 보내는 자리에도 둘 다를 알던 사람이 나오고 죽은 애 얘기를 하는거지. 그렇지만 얘는 혼자 조용히 좋아했잖아. 암 말도 없이. 그냥 속으로만 좋아한거지. 자기가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을 거라구. 그래서 살짝 쳐다보고 돌아서면서, 여기, 여기 이 장면이잖아. '탁' 이 문 닫는 소리. 이게 자기 마음에서 남자애를 떠나 보낸거야. 이 '탁'이 그 '오겡끼데스까'랑 완전히 대칭되는 소리인거지."
충격이었습니다. 영화의 그 세밀한 부분 하나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게. 그래서 뭔 말이 하고 싶은건데? 라면서 뒷짐지고 영화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였죠. 옛날 국어 시간에 시의 단어 하나 하나에 담긴 뜻을 공부하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 수업이 있고 얼마 안 있어서 다시 한 번 영화를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후지이 이츠키의 관점에서 영화가 보이더군요. 학창시절, 남몰래 마음 속으로만 했던 풋사랑. 말도 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없었던 남자아이. 어느 날, 잘 있으란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 아이. 그래서 그냥 조용히 도서실 문을 닫듯이 마음 속에서 떠나 보냈던 아이를 10년 후에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 보게 되었을 때 후지이 이츠키에게는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게 되살아났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후배들이 가져온 책 뒤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대출카드를 보는 순간, 그 아이도 자신처럼 모르게 혼자서 자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집에 책을 주러 온 것이 사실은 떠나기 전에 마음을 고백하러 온 처음이자 마지막 용기였고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나서 한 번 쳐다 본 그 눈이 아쉬움과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아마 가슴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당신은 잘 지내고 있느냐'고 외칠 수 있지만, 후지이 이츠키는 그저 책을 껴안고 있을 수 밖에, 옛날에 그랬듯이 마음 속으로만 그 때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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