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시도 ==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은 뉴펀들랜드에서 동남쪽으로 약 600km 떨어진 북대서양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은 마지막으로 보낸 구조요청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북위 41도 46분, 서경 50도 14분이라고 알렸습니다. 타이타닉의 참사가 있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침몰한 선체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배가 침몰한 정확한 장소를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당시의 기술로는 심해 탐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타이타닉의 항로와 침몰지점]
[타이타닉 참사를 알리는 뉴욕 해럴드 지]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은 수심이 거의 4,000미터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잠수함 기술의 발달이었죠. 20세기 초반에 침몰한 타이타닉을 찾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가능해졌습니다.
== 로버트 발라드 Robert Ballard ==
로버트 발라드는 1942년 미국 캔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자랐는데 그 때부터 수중탐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샌디에이고에 살면서 발라드는 심해잠수정 트리에스트(Trieste)의 탐사에 매혹되었습니다. 트리에스트는 스위스 과학자인 피카드르가 설계한 잠수정으로 1953년 8월에 건조되었는데, 처음 몇 년간은 지중해에서 탐사활동을 수행하다가 1958년, 25만 달러에 미해군으로 인도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마리아나 해구(Miriana Trench)에서 심해 잠수기록에 도전하여 10,911m 깊이까지 잠수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발라드는 화학과 지질학을 전공한 후에 미 육군 정보국에서 장교로 잠시 근무했고, 석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에는 미 해군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해군에서 그는 해양탐사국과 우즈홀 해양연구소(Woods Hall Oceanographic Institution) 간의 연락 업무를 맡았는데, 그 인연으로 1970년에 전역한 후에는 우즈홀 해양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1974년에 해양지질학과 지질학의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발라드가 처음으로 타이타닉 탐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3년 경으로 보입니다. 해군에서 일하는 동안에 발라드는 해상의 모선에서 제어가 가능한 소형 무인잠수정과 거기에 딸린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는 로봇팔을 보고 이를 이용한 해저탐사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발라드는 1977년 타이타닉 탐사를 처음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1985년 두 번째 탐사에 나섰지요.
[로버트 발라드]
== 탐사 ==
1985년의 탐사는 미 해군에서 지원해주었습니다. 사실, 미 해군에서 타이타닉 탐사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군은 70년 전에 침몰한 대서양 여객선보다는 20년 전에 침몰한 두 원자력추진잠수함 스콜피온(USS Scorpion)과 쓰레셔(USS Thresher)를 찾는 데 관심이 많았죠. 해군은 두 잠수함을 찾는 데 발라드의 수중탐사로봇인 아르고(Argo)가 꽤나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라드와 미 해군은 먼저 두 잠수함을 탐사하고, 침몰 후 20년 간 방사능 유출로 인한 영향에 대한 연구가 끝난 다음에 타이타닉 탐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죠.
발라드는 1982년부터 해군에서 다시 복무하였고, 잠수함 잔해를 탐사했습니다. 미 해군이 제시한 조건이 모두 만족되자 발라드에게 타이타닉 탐사 자금이 지원되었고 발라드는 1985년 두 번째 탐사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85년 8월 22일, 발라드는 노르 호(R/V Knorr)를 타고 탐사지점에 도착했습니다. 타이타닉의 잔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넓이는 1,300제곱킬로미터에 달했지만 발라드에게는 이전에 잠수함 탐사로부터 얻은 교훈이 있었습니다. 압궤심도를 넘어 침몰하는 경우는 수천 개의 파편이 해저에 뿌려지기 마련이고 그 중 커다란 파편들을 따라서 가다보면 선체를 발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죠. 발라드는 타이타닉 역시 그 잠수함들처럼 압궤되었을 것이고,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타이타닉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아르고는 해저를 샅샅이 훑으며 타이타닉의 파편을 찾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탐사범위가 넓어지면서 타이타닉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범위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노르 호의 계약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은 9월 1일에는 그 범위가 20제곱킬로미터까지 줄어들었죠.
== 발견 ==
9월 1일, 잔잔한 해저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움푹 파인 자국처럼 보였지만 곧 그것이 파편조각이라는 것이 드러났죠. 그리고 파편을 따라가던 아르고 앞에 선체가 나타났습니다. 침몰한 지 73년 5개월만에 타이타닉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심해탐사선 미르 1호(MIR I)가 찍은 타이타닉의 선수부분
타이타닉이 발견된 곳은 북위 41도 44분, 서경 49도 57분의 심해 4,000미터 바닷속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은 두 동강이 나 있었는데 앞부분과 뒷부분은 약 600미터 가량 떨어진 채로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타이타닉이 실제로 두 동강이 났는지 여부에 대해 생존자들의 진술이 엇갈려서 온전한 상태로 침몰했으리라 추측되었지만, 이 탐사에서 타이타닉이 반토막난 상태로 침몰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죠.
선수부분은 해저 침니에 약 18m 깊이로 파묻혀 있었습니다. 선체 일부가 파손되긴 했지만 대체로 온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갑판이 부분적으로 무너져 있었고 심한 손상부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후미부분은 선수보다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침몰 시점에 선수는 이미 바닷속에 잠겨 물이 내부에 가득 차 있었던 데 반해 후미는 침몰하는 순간에도 내부에 공기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침몰이 진행되면서 공기압은 증가하는 수압을 버티지 못했고 결국에는 선체가 파열되었던 거죠.
타이타닉의 잔해는 2.6제곱킬로미터의 범위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나무, 카펫이나 혹시 모를 시신들은 이미 해저 생태계에 흡수되서 사라진 지 오래였죠.
발라드는 타이타닉의 잔해에서 유물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도굴과 다름 없다고 생각해서 단 한 점의 유물도 인양하지 않았습니다. 1994년에 RMS Titanic Inc.가 잔해에 대한 인양권리를 인정받았고, 약 6천여 점의 유물이 인양되어 지금은 영국 그린위치의 국립 해양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 Titanic, 타이타닉 탄생에서 발견까지(完) ==
2009/04/30 - 1편 : 탄생
2009/05/03 - 2편 : 처녀항해 1부
2009/05/21 - 3편 : 처녀항해 2부
2009/07/08 - 4편 : 발견 (You're here)
'큰개자리로 가는 길 > 영화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Love Letter; 첫 사랑의 추억 (2) | 2009.07.13 |
---|---|
Love Letter; 조각모음 (1) | 2009.07.10 |
Titanic; 타이타닉, 탄생에서 발견까지 "3편 - 처녀항해 2부" (4) | 2009.05.21 |
Titanic; 타이타닉, 탄생에서 발견까지 "2편 - 처녀항해 1부" (0) | 2009.05.03 |
Titanic; 타이타닉, 탄생에서 발견까지 "1편 - 탄생" (1) | 2009.04.30 |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Total
- Today
- Yesterday
TAG
- 태평양전쟁
- 항공전사
- 로마
- 제임스 카메론
- 플라스쵸프 강제수용소
- James Cameron
- 이탈리아 여행
- 화이트 스타 선박
- 新민족주의
- IFRS
- 국제회계기준
- 가체
- 서울대학교
- Les Miserables
- 대학문학상
- Krarow
- 소설부문
- 처녀항해
- 중일전쟁
- 대학신문
- 크라코프
- 레 미제라블
- Schindler's list
- RMS Titanic
- 영어광풍
- 항공전
- 영화
- 타이타닉
- Captain Smith
- 민족주의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