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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전제가 정말 맞는 것이라면, 어디까지를 '나'라고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다다른다. '나'를 개인으로 한정하면 세상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효율성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인 협동을 활용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작용한다. 따라서 '나'의 범위는 집단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범위가 전인류까지 확장되는 것도 불가능하다(이미 모두가 다 같이 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했으므로). 결국 '나'는 개인과 전인류 사이의 규모를 가진 어떤 집단에서 타협을 이루어 구성되는데, 역사적으로 이 타협은 혈연관계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곤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타인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이다. 물론, 혈연 외에도 의리, 충성과 같은 신뢰와 관련된 수많은 개념이 등장하여 반드시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동질적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갖추어졌지만 그런 개념이 생기기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런 개념이 생긴 이후에도 타인에 대한 신뢰의 최후의 보루는 결국 혈연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세습체계를 들 수 있다. 좀 더 나아가면 근친혼(특히 왕족간의 혼인)을 볼 수 있다. 왕족과 왕족이 결혼하면 성골, 왕족과 귀족이 결혼하면 진골이라고 구분했던 신라의 계급제도도 근친혼의 확장된 범주에 속할 것이다. 최근의 사례를 보아도 청나라는 왕족을 친왕으로 봉하여 황제의 병풍 역할을 하도록 했다. (아주 최근의 사례를 보아도 영일대군 형님이 계시니 월산각하께서 얼마나 편하신가) 민법 개정을 통해 이제 동성동본의 혼인이 가능해졌지만, 우리나라의 동성동본 금혼제도 역시 혈연과 무관하지 않다. 옛날에 같은 부족 내에서는 혼인이 불가능했던 풍속이 있었는데, 이 풍속 역시 족외에서 신뢰해야 할 집단을 혈연으로 잇고자 하는 실리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피붙이만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배층에 근친혼을 성행시켰고, 믿을 수 있으려면 피붙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근친외혼을 엄격한 법도로 만들었다. 아무튼 '나'의 범위는 혈연관계를 통해 넓어져 간다. 세대가 흐를수록 내부의 구성원은 점점 많아지고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단순한 혈연관계를 통한 동질감 형성이 어려워진다. 더 커져야 할 필요성과 더 커질수록 유대가 옅어지는 문제의 딜레마는 혈연을 보완할 새로운 동질성을 집단에 부여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그것이 신화이다.
혈연에 기반을 두고 동일한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나'의 범위를 결정짓는다. 이것이 고전적인 민족의 개념이다. 신화는 혈연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만큼 민족의 시조로부터 민족이 탄생되어 이어져오는 내용을 담게 된다. 실질적으로 한 민족 내의 구성원들이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더라도 명목상으로는 모두 같은 시조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이로서 '나'는 혈연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충분히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 '나'의 범위가 더 확대될 필요 없이 충분히 커졌다면, 다음은 '나'와 '남'의 구분이다. 신화를 공유하지 않고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자는 모두 남이었다. 남은 아무리 너그럽게 대해봤자 서로 간섭하지 않는 관계였고, 보통은 빼앗고 쳐서 없애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유럽이 비빔밥처럼 뒤엉켜 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개개민족의 신화보다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어느나라 민족이든 똑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었으니까.
아무튼 민족 개념은 혈연에 바탕을 두고 신화 또는 종교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나마 종교가 개입한 경우는 확장성이 있었지만 신화의 힘을 빌린 경우는 그 확장에 제한이 있었다. (제한이 있다기 보다는 확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정도에서 민족이 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물이 고여 있는 것과 같다. 고인 물을 썪는 것처럼 정체된 집단은 뒤쳐질 수 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 민족주의가 비판받는 것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의 극우적인 성향에 대한 거부감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가 자칫 고립을 표방하면서 집단 전체의 활동성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단군 신화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을 뿐더러 남에 대한 배타적 성향도 강하며,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에 바탕을 둔 모든 민족이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건국되었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난 늑대신화이다. 로물루스는 라틴족의 한 부류를 이끈 지도자였는데, 라틴족은 세력 확장을 위해 사비니족의 처녀를 납치해 와 결혼식을 올린 후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사비니족과 합쳤다고 전해진다. 세력 확장이 혈연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혈연 기반의 민족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에서 특이한 점은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합병 과정에 전쟁이 있었고, 라틴족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니족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영웅전의 저자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는 이러한 로마 특유의 생존 전략에 대해 "패자조차도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로마의 천 년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로물루스의 뒤를 이은 2대 왕 누마는 사비니족 출신의 로마인이었다. 기원전 321년에 로마군은 카우디움 협곡에서 삼니움족에게 대패하고 항복하였지만, 기원전 290년 삼니움족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삼니움족 출신인 오타틸리우스를 집정관에 선출하였다(기원전 263년). 승자와 패자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는 이러한 방식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빛을 발한다. 2만 6천명의 병력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뛰어든 한니발이 노린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통한 로마 동맹국의 이탈이었지만, 그가 16년 동안 이탈리아를 휘젖고 다닐 때 그에게 협력한 로마 동맹국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분열되지 않은 로마연합은 75만명의 병력 동원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한니발은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기원전 90년에는 - 동맹시 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긴 했지만 -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동맹국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로마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의 두 번째 황제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속주 출신의 황제이다. (물론 로마시민이긴 했다) 에스파냐든 이탈리아든 북아프리카든 그리스든, 로마제국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제국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인이라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제국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에 30만 명 가량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는데, 시민권자들은 그 부여시기나 출신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인이란 피를 나눈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수많은 민족을 하나의 이름 아래 통합하여 4백년 이상 지속시킨 원동력은 이러한 개방성이었다. 훗날 로마 말기에 무너져가는 제국을 떠받치며 버틴 사람들의 상당수도 비로마출신 로마인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타인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이다. 물론, 혈연 외에도 의리, 충성과 같은 신뢰와 관련된 수많은 개념이 등장하여 반드시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동질적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갖추어졌지만 그런 개념이 생기기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런 개념이 생긴 이후에도 타인에 대한 신뢰의 최후의 보루는 결국 혈연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세습체계를 들 수 있다. 좀 더 나아가면 근친혼(특히 왕족간의 혼인)을 볼 수 있다. 왕족과 왕족이 결혼하면 성골, 왕족과 귀족이 결혼하면 진골이라고 구분했던 신라의 계급제도도 근친혼의 확장된 범주에 속할 것이다. 최근의 사례를 보아도 청나라는 왕족을 친왕으로 봉하여 황제의 병풍 역할을 하도록 했다. (아주 최근의 사례를 보아도 영일대군 형님이 계시니 월산각하께서 얼마나 편하신가) 민법 개정을 통해 이제 동성동본의 혼인이 가능해졌지만, 우리나라의 동성동본 금혼제도 역시 혈연과 무관하지 않다. 옛날에 같은 부족 내에서는 혼인이 불가능했던 풍속이 있었는데, 이 풍속 역시 족외에서 신뢰해야 할 집단을 혈연으로 잇고자 하는 실리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피붙이만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배층에 근친혼을 성행시켰고, 믿을 수 있으려면 피붙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근친외혼을 엄격한 법도로 만들었다. 아무튼 '나'의 범위는 혈연관계를 통해 넓어져 간다. 세대가 흐를수록 내부의 구성원은 점점 많아지고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단순한 혈연관계를 통한 동질감 형성이 어려워진다. 더 커져야 할 필요성과 더 커질수록 유대가 옅어지는 문제의 딜레마는 혈연을 보완할 새로운 동질성을 집단에 부여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그것이 신화이다.
혈연에 기반을 두고 동일한 신화를 공유하는 집단이 '나'의 범위를 결정짓는다. 이것이 고전적인 민족의 개념이다. 신화는 혈연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만큼 민족의 시조로부터 민족이 탄생되어 이어져오는 내용을 담게 된다. 실질적으로 한 민족 내의 구성원들이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더라도 명목상으로는 모두 같은 시조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이로서 '나'는 혈연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충분히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 '나'의 범위가 더 확대될 필요 없이 충분히 커졌다면, 다음은 '나'와 '남'의 구분이다. 신화를 공유하지 않고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자는 모두 남이었다. 남은 아무리 너그럽게 대해봤자 서로 간섭하지 않는 관계였고, 보통은 빼앗고 쳐서 없애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유럽이 비빔밥처럼 뒤엉켜 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개개민족의 신화보다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어느나라 민족이든 똑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었으니까.
아무튼 민족 개념은 혈연에 바탕을 두고 신화 또는 종교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나마 종교가 개입한 경우는 확장성이 있었지만 신화의 힘을 빌린 경우는 그 확장에 제한이 있었다. (제한이 있다기 보다는 확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정도에서 민족이 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물이 고여 있는 것과 같다. 고인 물을 썪는 것처럼 정체된 집단은 뒤쳐질 수 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 민족주의가 비판받는 것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의 극우적인 성향에 대한 거부감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가 자칫 고립을 표방하면서 집단 전체의 활동성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단군 신화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을 뿐더러 남에 대한 배타적 성향도 강하며,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화에 바탕을 둔 모든 민족이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건국되었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난 늑대신화이다. 로물루스는 라틴족의 한 부류를 이끈 지도자였는데, 라틴족은 세력 확장을 위해 사비니족의 처녀를 납치해 와 결혼식을 올린 후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사비니족과 합쳤다고 전해진다. 세력 확장이 혈연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양상은 전형적인 혈연 기반의 민족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에서 특이한 점은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합병 과정에 전쟁이 있었고, 라틴족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비니족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영웅전의 저자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는 이러한 로마 특유의 생존 전략에 대해 "패자조차도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로마의 천 년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로물루스의 뒤를 이은 2대 왕 누마는 사비니족 출신의 로마인이었다. 기원전 321년에 로마군은 카우디움 협곡에서 삼니움족에게 대패하고 항복하였지만, 기원전 290년 삼니움족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 삼니움족 출신인 오타틸리우스를 집정관에 선출하였다(기원전 263년). 승자와 패자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는 이러한 방식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빛을 발한다. 2만 6천명의 병력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뛰어든 한니발이 노린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통한 로마 동맹국의 이탈이었지만, 그가 16년 동안 이탈리아를 휘젖고 다닐 때 그에게 협력한 로마 동맹국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분열되지 않은 로마연합은 75만명의 병력 동원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한니발은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기원전 90년에는 - 동맹시 전쟁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긴 했지만 -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동맹국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로마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의 두 번째 황제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속주 출신의 황제이다. (물론 로마시민이긴 했다) 에스파냐든 이탈리아든 북아프리카든 그리스든, 로마제국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제국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인이라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제국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년에 30만 명 가량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는데, 시민권자들은 그 부여시기나 출신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인이란 피를 나눈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지중해 전역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수많은 민족을 하나의 이름 아래 통합하여 4백년 이상 지속시킨 원동력은 이러한 개방성이었다. 훗날 로마 말기에 무너져가는 제국을 떠받치며 버틴 사람들의 상당수도 비로마출신 로마인이었다.
== 新민족주의 ==
2009/04/17 - 新민족주의; #1
2009/04/20 - 新민족주의; #2
2009/04/21 - 新민족주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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