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월 20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결국 PSI 전면참여는 (또는 전면참여 선언은) 일단 유보된 모양이다. 정부는 PSI 전면참여 발표가 늦어지는 이유를 미국 등 관련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관련자에 따르면 "PSI 전면 참여 방침은 변함이 없고 한국은 국제사회의 WMD(Weapon of Mass Destruction, 대량살상무기) 확산저지 활동에 지속적으로 동참할 것"이라고 한다. PSI 전면참여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며 다만 "발표시기는 제반 요인들을 감안하여 전략적으로 선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이라고 기사는 덧붙이고 있다.
정부, PSI연기 美 등 관련국에 설명 "연합뉴스" << 기사 보기
이 정부는 처음 출범할 때부터 실용을 그렇게 강조해 왔지만, 솔직히 역대 어느 정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실용 따위는 과감하게 신경 끄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었다. 이번 일만 놓고 보아도 정부가 실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정부가 '실용'이라는 단어를 '명분'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만약 이것조차 오해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냥 Ctrl + F4 누르는 것이...) 실용과 명분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이다.
명분 : 일을 꾀하는 데에 있어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
실용 : 실질적인 쓸모
(출처: 다음 국어사전)
즉, "우리는 실용을 중시하겠소"라는 선전은 단순히 "우리는 실질적인 쓸모를 중시하겠소"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는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면 실리를 더 챙기겠소"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실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명분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대충 얘기하자면 반드시 세워야 하는 명분의 하한선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이번 PSI와 관련된 일련의 움직임에서 MB정부가 실용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명분 뿐이다. PSI와 관련된 정부의 입장은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볼 때 PSI 전면참여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좋다. 그것을 명분이라고 보자. 그렇다면 실용이란 실제로 우리가 PSI에 참여하는 것이 얼만큼 이득이 될 것인지 따져보는 것이다. 수준 낮은 실용외교를 한다면 PSI에 참여하는 것이 이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참여여부를 결정할 것이고, 수준 높은 실용외교를 한다면 PSI에 참여하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방법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멋지게도 실리도 명분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PSI 전면참여라는 것이 북한을 자극할 수 밖에 없는 만큼 북한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실리(양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타 동맹국들로부터도 실리를 얻어내진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PSI 참여라는 명분마저도 얻어내지 못하고 관련국들에게 PSI 참여 시기가 늦어지는 이유를 해명하고 설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명분을 잃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그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일들이 한 두 개였것냐마는 이번은 너무도 우스워졌다. 한 번 그간의 정부 입장 변화를 돌아보자.
2008년 10월 8일, 이상희 국방장관 국회 국정감사에서 PSI 전면참여가 필요하다고 밝힘
2009년 2월 16일, 이상희 국방장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PSI에 참여하겠다고 답변
2009년 3월 5일, 외교통상부 브리핑에서 PSI 전면참여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
북한 인공위성 발사 예고
2009년 3월 20일, 유명환 외통장관 인터뷰에서 북한 로켓 발사 시 PSI 전면참여 여부 검토할 필요성 있다고 밝힘
2009년 3월 23일, 외교통상부 브리핑에서 PSI 전면참여 검토 중이라고 발표
2009년 3월 30일, 북한 조평통 담화에서 한국 PSI 전면참여시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발표
2009년 3월 31일, 미국 게이츠 국방장관 북한 발사체 요격계획 없다고 발표
2009년 3월 31일, 이명박 대통령 북한 발사체에 대한 군사적 대응 반대 의견
2009년 4월 2일, 외교통상부 브리핑에서 북한 로켓 발사 시 PSI 전면참여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발표
2009년 4월 3일, 권종락 외교1차관 PSI 전면참여가 정부방침이라고 밝힘
북한 인공위성 발사
2009년 4월 5일, 정부 공식성명에서 PSI 전면참여 선언 제외
같은 날, 외교부 PSI 전면참여는 며칠 더 두고 볼 것이라고 밝힘
같은 날, 유명환 외통장관 북한의 발사체는 인공위성인 것 같다고 언급
같은 날, 이상희 국방장관 PSI 참여 가능성 높아졌다고 언급
2009년 4월 6일, 이명박 대통령 PSI 전면참여 추진 중이라고 밝힘
2009년 4월 7일, 한승수 국무총리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PSI 전면참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힘
2009년 4월 9일, 미 국무부 한국의 PSI 전면참여 지지
같은 날, 유명환 외통장관 PSI 전면참여 여부를 두고 관련국과 협의 중이라고 밝힘
2009년 4월 12일, 주말 경 PSI 전면참여 선언할 것이라는 보도
2009년 4월 14일, 청와대 브리핑에서 PSI 전면참여 곧 발표할 것이라고 발표
같은 날,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으로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려 표명
같은 날, 북한 6자회담 탈퇴 선언
같은 날, 정부 PSI 전면참여 확정, 15일에 공식발표할 것이라고 밝힘
같은 날, 미국 한국의 PSI 전면참여 환영
2009년 4월 15일, 정부 PSI 전면참여 발표 일시연기
2009년 4월 16일, 유명환 외통장관 PSI 전면참여 방침에 변화 없다고 밝힘
2009년 4월 18일, 북한 한국의 PSI 참여는 선전포고라고 경고
같은 날, 정부 PSI 전면참여 발표 다시 연기
2009년 4월 19일, 정부 PSI 전면참여가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는 아니라고 주장
같은 날, 정부 PSI 전면참여 발표 다시 연기
2009년 4월 20일, 청와대 PSI 참여는 오늘 내일 중으로 호들갑떨면서 가입하거나 전면철회 할 일이 아니라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
2009년 4월 21일, 정부 PSI 전면참여 여부 잠정 유보
같은 날, 정부 PSI 전면참여 선언 연기에 대해 관련국들에 해명
써 놓고 보니 꽤나 길다. 아무튼 대충 보면 북한 미사일 발사라는 문제만 빼면 정부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는가? 요약해 보면 이런 식이다.
미국, 한국에게 PSI 전면참여 요구
한국, 대북관계의 특수성 고려하여 제한적 참여
한국, PSI 전면참여 검토할 필요성 제기
한국, PSI 전면참여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
북한, 은하2호 발사계획 발표
한국, PSI 전면참여 검토 중이라고 발표
북한, 한국 PSI 전면참여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경고
한국, 북한 로켓 발사시 PSI 전면참여할 것이라고 경고
미국, 한국의 PSI 전면참여 방침 지지, 환영
미국, 북한 미사일에 대한 요격계획 없다고 발표
북한, 로켓 발사
UN안보리, 예상보다 낮은 수준의 의장성명 채택
한국, PSI 전면참여 확정
미국, 한국의 PSI 전면참여 환영
한국, PSI 전면참여 발표 연기
북한, PSI 전면참여는 선전포고라고 재차 경고
한국, PSI 전면참여 발표 연기
한국, PSI 전면참여 발표 연기
한국, PSI 전면참여 발표 연기
한국, PSI 전면참여 발표 연기 이유에 대해 관련국들에게 해명
지금 PSI에 전면참여 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3년간을 보면 PSI 전면참여는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었고 한국은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국제정세 부합과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라는 명분을 포기하면서 남북관계 긴장 고조를 회피하는 실리를 챙기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남북관계 악화를 무릅쓰고라도 PSI에 전면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실리를 버리고라도 명분을 찾자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은 환영하기 마련이다. 자기네 요구조건을 알아서 먼저 들어주겠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나라가 없다. 그러더니 북한의 미사일 발사시기를 전후해서 하는 짓거리란,
대북 경고와 대북 압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만 북한에 알려준 꼴이 되었고 이제는 PSI에 전면참여하지 않는 사유를 해명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PSI 전면참여시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 사태에 봉착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이걸 합네 저걸 합네 설치더니 PSI 전면참여라는 미국에 대한 큰 외교카드를 이따위로 낭비해 버린 것이다. 이제 카드는 미국에게 갔다. 미국이 우리에게 참여를 요청하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에게 참여 연기를 요청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명분 따윈 없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맞추어 우리 나름대로의 자주적인 외교를 못하는 마리오네트 같은 나라라는 걸 전세계에 광고한 꼴이 되었다. 실리따윈 옛날에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 더 이상 PSI에 참여하겠다고 북한을 압박할 수도 없다. 북한과의 긴장 완화는 꿈같은 소리다.
실리를 포기하면서 명분도 찾아오지 못하는 정부. 이게 바로 이명박이 지난 1년 내내 외쳐댔던 실용정부의 본 모습인가? 실리와 명분을 둘 다 살리는 것까지 요구하는 게 이 정부에게는 무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실리와 명분 둘 중 하나만이라도 확보하기에 이 정부의 용량은 여전히 부족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