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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진주만인가 ==

이런 상황에 몰리자 일본 수뇌부는 자신들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해 세력인 미 태평양 함대에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야 한다고 결론 내렸고,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에게 상황이 점점 불리해질 것이 자명한 현실에 다급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1939년 8월, 일본해군 연합함대사령장관의 자리에 올라 일본 해군의 수장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구 제독은 초급장교 시절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경험이 있어서 미국 산업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계속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일본에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일본 해군을 대표해서 계속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의 열성 군국주의자들이 야마모토를 공적으로 치부하고 암살을 기도했다. 사실 이 시기의 일본은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많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던 해군대신은 야마모토를 암살자의 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내 보냈던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의 풍경. 기습 한 달 전의 모습이다. 가운데의 섬이 포드 섬이고 그 옆에 전함들이 정박해 있다. 이렇듯 전투함의 정박지로서는 최상이었지만 항의 입구가 좁아 기습을 당하면 함선들이 빠져 나갈 곳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야마모토를 비롯한 해군 지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를 쥐고 흔들던 수상 겸 육군대장 도죠 히데키는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야마모토는 이렇게 된 바에는 일본 해군이 전면에 나서서 미 태평양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빠른 시일 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미국과 강화를 체결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주만에 집결해 있는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격멸하기 위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전쟁은 육군보다는 일본 해군이 주역을 맡아서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미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에서 신속하게 격멸시킨다면 미국은 함대를 2배나 먼 거리의 본토로 철수시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함대 규모에 있어서 일본의 연합함대가 훨씬 우세한 상황이 되므로 태평양의 제해권은 일본에게 쉽게 넘어올 것이었다. 미국의 산업이 군수체제로 전환하여 물자를 쏟아내기 전에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야마모토에게는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가 꼭 필요했다. 야마모토는 일왕 히로히토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히로히토가 일본 해군의 능력으로 미 해군을 제압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처음 1년간은 분명히 두드러진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1년을 넘긴다면 그 때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산업능력을 잘 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후면 미국은 엄청난 산업능력으로 군수물자를 쏟아낼 것이고 이렇게 되면 상황은 매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야마모토의 우려에 대해서 일본 수뇌부는 1년이면 유럽의 독일군이 소련군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고 미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을 써야 할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태평양의 전쟁은 포기하고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인정하는 강화조건에 응해야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항공모함 아카기.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항모이다. 애초에는 60기의 함재기를 탑재했으나 계속된 개수를 통해 비행갑판이 넓혀 90기까지 탑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1941년 가을, 일본 수뇌부는 수많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대부분의 육군 장성들은 동남아시아의 유전지대를 손에 넣으려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회의 때마다 남방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태평양 함대를 그냥 놔두고 남방작전을 감행하는 것은 언제 뒤통수를 맞을 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 야마모토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해군 장성들은 대부분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일본 해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장성들은 해전의 승리는 전함의 거포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전통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군의 항공력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게다가 무슨 수로 적에게 들키지 않고 6척의 항공모함과 20여 척의 호위함대를 이끌고 그 먼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간다는 말인가? 만일 작전이 발각되면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의 앞마당에서 불리한 해전에 빠져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해전에도 항공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다른 해군 장성들이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함의 거포에 의한 대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식의 포격전을 위주로 한 해전은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며, 이미 미국도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일본의 전함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해군 조종사들이 소지하고 있던 진주만 지도. 진주만 기습 당시 격추된 일본기에서 발견된 것으로 공격 목표들이 요약되어 있다]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항모가 기습 공격의 주력이며 진주만 공격은 일본의 모든 작전 중에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고, 결국 전함파 제독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접어야 했다. 그리하여 일본 해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할 최우선의 공격 목표는 진주만으로 정해졌다. 물론 해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과 동시에 남방작전도 개시되어 일본 해군과 육군도 동남아시아 방면의 미군과 영국군에게 즉각적인 기습 공격에 착수하기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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