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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부터 주룩주룩 내린 비에 왠지 몸과 마음이 다 눅눅해진 느낌이었지요. 원래 비가 오는 날이면 컨디션이 뚝 떨어지는 체질이라 그러려니 싶기도 했지만, 어제는 특히나 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그 참극이 일어난지 30년이 되던 날이었으니까요.





서울의 봄

1980년 5월 17일 자정 기해 그 때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선포되어 있던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비상계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에 이미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시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지만 18년 동안 억압되었던 자유에의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대학생, 재야 인사, 일반 시민들은 민주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고, 국회에서도  유신헌법을 개헌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열의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집회에서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10만여 대학생들은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에서는 4년 임기 1차 중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를 거쳐 사실상 확정됨으로써 오랜 기간 짓밟혔던 국민주권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밋빛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역 집회에서 대학생 지도부는 시민의 호응 없이 심야에 대규모 집회를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어쨌든 당시는 비상계엄 상황이었지요. 이수성 전 국무총리(당시 서울대 학생처장)는 대학생들이 행진을 시작하면 발포할 수도 있다는 정보를 듣고 집회를 말렸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매파였던 유시민 등은 이 많은 인원이 다시 모이기 어려우니 지금이 기회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일명 '서울역 회군'입니다. 그리고 불과 이틀 후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신군부에서는 비상계엄 확대 실시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10호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포고령에서는 모든 정치활동 및 집회, 시위의 완전 금지(2호 가), 모든 언론활동의 사전 검열(2호 나), 모든 대학에 휴교령 발동(2호 다)을 지시했고,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집회에서 절정에 달했던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 요구를 질서교란행위로 몰아붙여 묵살하고, 5월 20일에 예정된 - 아마도 개헌안이 상정되었을 - 국회 본회의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 자신들도 목숨을 걸고 실행했을 군사반란,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17일 밤 사이에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서울지역 대학생 지도부를 기습한 군은 18일 새벽에는 특전사 제7여단으로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 지역 대학을 점령했습니다.

왜 하필 광주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고 있지만, 사실 그 때만 해도 광주 못지 않게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빈번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반독재 시위가 가장 크게 일어났던 곳은 부산과 마산이었지요(1979년 10월의 부마사태). 광주의 김대중 못지 않게 군사정권에게 심한 탄압과 핍박을 받은 사람이 부산의 김영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광주였을까요.


이유가 어찌 되었건 5월 18일 새벽부터 광주에 주둔한 특전사(5월 18일 새벽 2시경 제31사단 제96연대로 배속전환)는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문제를 만들어 해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규모 유혈 진압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단 진압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겠지요.





80년 5월, 광주

80년 5월의 광주를 이야기 할 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치열함입니다. 특수전을 위해 양성된 공수부대가 등 뒤에 총을 메고 - 나중에는 총검을 꽂았고, 그리고는 발포를 했지요 - 곤봉으로 시위대를 내려치는 장면과 체육관에 들어찬 수많은 나무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와 4열로 그 선두를 지키고 있던 버스들. 이런 것들이 80년 5월의 광주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풍경입니다.




네, 정말 치열했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보면 나오지요. 최 준장(권태원 분)이 했던 대사라고 기억하는데 아마 이랬을 겁니다.

일반 시민? 야, 대한민국 군대에 총들고 대항하는 것들이 어떻게 일반 시민이야!


저는 저 문장이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대한민국 군대에 총을 들고 대항하는데 어떻게 일반 시민일까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판단에는 대한민국 군대가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공권력과 일반 시민 권력이 맞붙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권력의 정당성입니다. 공권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위임한 권력입니다. 소극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국방, 사회질서 등의 공공재를 생산하기 위해서 위임한 것이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는 개인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공동체의 이익을 저해하는 소수에 대해서도 행사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이 소수의 권력자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과연 80년 5월의 광주에서 일반 시민에게 행사된 공권력은 정당한 공권력이었을까요.





비상계엄

국민이 가지는 기본권은 거의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헌법(제7차 개정)에서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하긴, 그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라는 규정도 있긴 하군요. 어쨌든, 국민의 기본권은 국가가 최대한으로 보장하여야 하는 가치입니다. 헌법이 나열하고 있는 이러한 기본권은 인권, 평등권,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통신의 비밀,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지금 헌법(제9차 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헌법에서는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이라는 단서조항이 있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 조항마저 사라졌죠. 어쨌든, 헌법에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국가가 절대적으로 보장하라고 규정한 그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27일 선포된 비상계엄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 계엄법입니다.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이 선포된 경우, 계엄사령관이 해당 지역의 행정기관 및 사법기관을 지휘감독하며 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체포, 구금, 수색,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단체행동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이에 반하는 언동을 하는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25가지의 죄목에 대해서는 민간인에 대해서도 군법을 적용하여 재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계엄포고령 10호는 이러한 특별한 조치로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이희성이 선포한 것입니다.


계엄법은 필요에 의해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률입니다. 따라서, 계엄이 선포되기 위한 상황은 국가적 위기인 전쟁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80년 5월 이전에, 그리고 5월 광주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구호가 '비상계엄 철폐'였던 것은 비상계엄이 공동체의 필요가 아닌, 신군부의 필요에 의해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상황을 그만 두라는 요구였었지요. 국민들의 요구가 끊이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신군부는 고민에 빠졌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잘못되면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거나 평생 또는 수십 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군사반란까지 일으켜 가면서 정권을 잡고자 했는데,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을 테니까요.




투쟁

광주 시민이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를 하진 않았을 겁니다. 18년 독재가 지긋지긋했고 민주화 열망이 강했다고 해서 광주 시민이 특별히 부산 시민이나 서울 시민보다 더 투쟁의식이 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었던 광주는 5월 핏빛으로 물들었고 평범한 광주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시민군이 되어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정말 그들은 폭도였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반국가 좌익 세력이었을까요? 30년 전에 그랬듯이 광주 시민은 빨치산이었을까요? 만약, 이런 일이 대구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요. 1948년에 전라도에서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했다면 같은 해에 대구에서도 십일폭동이 일어났었지요. 대구 시민들도 총을 들고 일어서서 맞서 싸웠을까요?

저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광주 시민의 봉기와 투쟁은 지역 감정과 이념의 산물이 아니라 상식과 양심의 발로였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 투사로 탄압받은 만큼 김영삼 전 대통령도 탄압받던 민주 투사였습니다. 길 가던 시민이 공수부대의 곤봉세례를 받고 속옷만 남긴 맨바람으로 길거리에서 기합을 받고 영문도 모른채 트럭에 실리고 도망치던 이들이 탄 택시와 버스 기사까지 끌려 내려져 구타 당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광주 시민이든 대구 시민이든 부산 시민이든 그냥 보고만 있었을까요. 국민의 방패여야 할 군대가 정권의 칼이 되어 마치 적지에 진입한 점령군처럼 폭력을 가하는 상황이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상식과 내 눈 앞에서 피 흘리고 도망가는 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양심이 사람들에게 무기를 들게 한 것이었습니다.

18일에 공수부대의 미친 듯한 폭력을 경험하고 나서도 오히려 19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던 것은 그들이 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먹었던 겁보다도 쓰러지고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80년 5월, 광주 시민은 위대했습니다. 그들이 타고난 투사이거나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 위대했습니다. 대전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들 역시 일어났을 것이고 그들도 위대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신군부는 광주를 찍었고, 광주는 피흘렸으며 투쟁했고 그래서 위대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위대하다는 말은 그 날을 표현하기엔 너무 식상합니다. 어린 딸이 위험에 처했을 때 모든 아버지는 딸을 지키기 위해 대신 그 위험을 무릅쓸 겁니다. 누구든지 그럴 것이라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했던 사람의 부정(父情)을 부인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그랬을 것이라고 해서 광주의 봉기를 부인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광주에게 빚을 졌습니다.

80년대에 민주주의란 곧 '광주정신의 계승'과 '광주를 잊지말자' 였습니다. '오월 광주'는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사람들은 피흘리는 광주를 기억하며 민주 투쟁에 나섰습니다. '오월 광주'는 100년도 되지 않은 짧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향유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이 시켜준 독립이라는 자조적인 비아냥은 있을지언정, 남이 시켜준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그 중에 광주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럼 30년 전의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광주가 요구한 것은 그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 하나 뿐입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주장할 수 없던 것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습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는 노래 가사는 그렇기에 오월 광주를 기리기에 너무나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오월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그 날 앞서서 나갔던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개척한 길을, 우리는 과연 잘 따라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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