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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별 되기/짧은 생각

영어정책

iulius 2009. 7. 30. 18:02


이 카테고리에 새 글을 올린지도 거의 세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요즘 같은 때에나 머리 좀 쉬면서 생각할 여유가 있을테니 이 김에 새 정부 영어정책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해 볼까 합니다. 먼저 저는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분명히 중요한 능력이며,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는 지금 효율적인 영어사용 가능인력의 육성이 현실적으로 국가의 전략적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의는 어디까지나 영어 그 자체의 중요성에 대한 입장일 뿐,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대하는 태도를 보는 제 시각은 예전에 포스팅 했던 이준구 교수님의 시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영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무엇보다도 전세계가 밀접하게 엮여 돌아가는 국제화 시대, 지구촌 시대인 이 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영어가 중요한 것이지요. 언어 구사력이 뛰어날수록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뛰어난 언어 구사력은 전달의 매개체에 불과할 뿐, 결코 뛰어난 능력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의 수준이 100인 사람은 언어구사력에 따라 30이든 50이든 100이든 표현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200 수준의 언어 구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100까지 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준이 언어 구사력보다 높은 경우에는 언어 구사력도 하나의 능력(전달능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준이 언어 구사력보다 낮다면 언어구사력은 아무리 높아봐야 쓸데없는 능력이 될 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지요. 甲과 乙이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준은 동일하게 100입니다. 그런데 甲의 언어 구사력은 70이고 乙의 언어 구사력은 90이라고 하면, 甲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70이고 乙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90이 되겠지요. 실제로는 두 사람의 능력이 동일한 수준이라고 해도 관찰자들은 乙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가 된다면 언어 구사력은 능력 측정의 지표로서 쓰이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능력이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언어 구사력이 더 뛰어난 사람, 즉 의사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사회적 차원에서는 더 뛰어난 사람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언어 구사력이 실제로 능력의 지표로 활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상황에서는 언어 구사력을 잣대로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 향상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甲의 언어 구사력은 70이고 乙의 언어 구사력은 90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甲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준은 100이지만 乙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수준은 50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甲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이전 예에서와 같이 70이겠지만 乙이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이제 50으로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甲이 乙보다 더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나 만약 언어 구사력 하나만을 가지고 능력을 평가한다면 甲의 능력은 70, 乙의 능력은 90이므로 乙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허름한 집에서 파는 맛있고 위생적인 음식보다 전망 좋은 부페에서 파는 맛없고 비위생적인 음식을 더 좋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차라리 관찰자가 정말 영어를 잘 해서 위의 예시 같은 경우에 乙의 실제 능력은 50 밖에 안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나라 곳곳의 관찰자들은 그 정도의 수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금발의 백인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보면 내 나라에 있었을 때는 맡지 못하던 이상한 냄새들이 많이 나는데, 그게 한국이 미개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나요?"라고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면 모르긴 몰라도 절반 이상은 멋쩍게 따라 웃으면서 악수를 할 겁니다. 적절하지 않은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제가 생각하는 바는 우리나라의 영어 평가는 오로지 영어 구사력에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영어로 표현되고 있는 내용의 수준 그 자체에 대한 평가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어 구사력 만에 대한 평가 결과가 내용의 수준에 대한 평가로 둔갑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다는 것은 압니다.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해야 하고, 영어를 잘 해도 능력이 없으면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분들도 많겠지요. 그러나 그 비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영어만 잘 하면 그냥 인정받는 사례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아, 영어만 잘 하면 안된다는 얘기를 들어보긴 했습니다. 이제는 중국어나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더군요.

영어 구사력이 그 사람의 능력 자체인양 평가되고, 오직 영어만 잘 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안 되는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 일등 공신은 정부의 대학 입시정책과 기업의 입사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잘하면 더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영어만 잘하면 영어만 못하는 사람보다 더 인정받는데 뭐하러 다른 걸 신경쓰겠습니까. 그러니 미국에서는 월마트에서 점원 밖에 못 할 수준의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원어민 영어 선생님으로 대접받고 살 수 있는 거지요.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이고, 공급이 적으니 몸값이 올라가는 것이고, 공급자는 돈 받으면서 큰소리치고 수요자는 제 돈 내면서도 항상 쩔쩔매는 겁니다.

그렇다고 다들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서 평균적인 영어 사용 능력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험에 나오는 것만 공부해서 성적만 올리는 것이지요.(시나공이라던가요?) 당연한 겁니다. 영어로 표현되는 내용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어 그 자체가 더 중요한데 뭐하러 시험 외의 것을 공부하겠습니까. 그 덕분에 토익 900점에 국제전화 한 통 못 받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왔죠.

영어는 중요합니다. 국제화시대에 의사소통을 위해서 영어는 분명히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어는 국제화시대에 적합한 능력을 가졌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지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고, 그 사람의 다른 능력 모두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정작 미국에서는 벙어리나 귀머거리들에게 의사소통 문제로 인해 불이익을 주면 차별금지법으로 처벌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사지멀쩡한 사람들이 영어 하나 못한다는 이유로 영어 하나만 잘 하는 사람에 비해 엄청난 불이익을 받고 살고 있지요. 아마 베토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졸업영어시험 듣기평가를 통과 못 해서 졸업을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유전자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가타카>, <가타카>와 지금의 우리 나라가 얼마나 다른가요?

인수위원회는 영어몰입교육의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대학에서도 flip-flop을 '후리후라'라고 읽는 교수님이 아직도 계신 마당에 3년 내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영어교육을 모두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사실 가능하다면, 좋은 정책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최소한 익숙하게 영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경찰관이 달려와서 "How are you?"라고 묻는다면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한다는 한국인 유머 따위는 더 이상 없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교사의 배치만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번 완벽히 말하는 사람보다 백 번 틀리게 말하는 사람이 더 쉽게 익숙해지는 것이 언어의 특성이니만큼 수업이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지금같은 주입식교육 하에서 그게 언제쯤에나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만약, 이렇게 된다면... 하는 장밋빛 기대는 여기까지입니다. 영어 이외의 과목도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인수위원회의 발상은 대체 누가 어떻게 시작한 건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영어로 나머지 모두를 평가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영어를 못하면 의무교육도 못 받는 처지가 되는 건가요?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70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이제 우리는 일제시대에 일본어를 떠받들듯이 영어를 떠받들어야 하는가 봅니다. 그나마 일제시대는 강제로 당한 것이기라도 했죠. 대학에서 현재 진행 중인 영어 강좌는 대부분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는 양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그 질적인 수준이 뒷받침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도 완벽히 수업을 하지 못하고 학생들도 완벽히 참여할 수 없다면, 그래서 30분이면 설명 가능한 내용에 한 시간 반을 쏟고도 학생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대체 이런 수업의 효율성을 희생시켜서 얻을 수 있는 영어강좌의 장점이란 게 무엇일까요?

예전에 경복궁에 미국인 친구들과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좌 뒤에 있는 오봉산일월도의 이름을 묻는 녀석에게 "five mountain..."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오봉산일월도"라고 불러줬었습니다. 고유명사를 뭐하러 번역하려고 애쓰나 싶기도 했고, 한글로도 풀어서 안 읽는 것을 굳이 영어로 풀어서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오봉산일월도의 영어표현이 있었고 제가 그 표현을 알았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국민이 오봉산일월도의 영어 이름 따위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도 저는 사람들이 영어에 대해 갖는 인식을 바꿔줄 수 있는 정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영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외국인이 "Excuse me"라고 물어보면 "I'm sorry"라며 손을 내젓는 것보다는 "한국말 못 해요?"라고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내 나라 땅에서 남의 나라 말 못하는 게 그렇게 주눅들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태원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영어 잘하고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일어 잘한다고 집 앞 구멍가게 아저씨도 영어, 일어 잘 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영어 못하는 건 죄도 아니고 인격적 결함도 아니고 저능함의 표상도 아닙니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의 차이도 구별 못해서 '가르키다' 따위의 말이 방송에 나오고, '어의가 없다'는 어이없는 댓글이 인터넷에 도배되는 국어 사용의 현실에는 관심도 안 가지면서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라 '밸런타인 데이'라느니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라느니 따위의 고민은 많이들 합니다. 모두가 영어만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은 없는 건가요?

영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영어는 필요한 사람들만 필요한 수준에서만 익히면 된다고 생각될 때가 되서야 지금과 같은 영어광풍, 영어 사대주의는 줄어들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전국민이 영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정책, 그런 정책은 그 날이 왔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시급한 고민들도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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