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보통 상류층, 지배층 또는 기득권층이 일반 민중의 삶에 무지함을 비꼬는데 사용하는 유명한 인용구입니다. 문장구조만 봤을 때는 악의를 더해서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먹든지'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빵만 찾지 말고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을 해도 결국은 악의를 더해서 해석하게 되는데, 저 말을 하는 사람이야 진실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조언을 했을지는 몰라도 듣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훨씬 더 사치스러운 케이크를 찾아보라는 조언은 조언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 말을 했다면 상대방이 사람을 가지고 장난친 것이고 모르고 말을 했다면 상대방이 이 상황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 말은 상대방이 장난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악의를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상대방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현실의 불평등을 인식하게 되어 악의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본디 조언을 주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삽질이기 때문에 21세기인 요즘에도 생각 외로 이런 발언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유명한 사례로는 4년 전의 배추값 폭등 당시 높은 김치 값에 김장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앞으로 청와대 식탁의 김치는 양배추로 담가 올리라'고 지시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미 양배추가 더 비싸졌다고...) 본인은 정말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겠다며 주무부처인 농림수산부가 '배추 덜 먹기 운동'을 전개한다든지 중국 배추 수입량을 늘리겠다고 하는 등의 정책을 내 놓으면서 딱 저 인용구 수준의 발언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저 말을 처음 했다고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niette입니다. 1755년, 오스트리아 황실의 막내공주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 de France)인 루이 오귀스트Louis-Auguste에게 시집 온 그녀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에 단두대(Guillotine)에서 38세의 나이로 처형당했습니다. 남편인 루이 16세Louis XVI는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되었으나 그녀의 죄목은 근친상간이었습니다.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Élisabeth de France와 함께 자신의 아들인 루이 17세Louis XVII를 겁탈했다는 죄목이었지요(마담 엘리자베트도 처형되었는데, 정작 그녀의 죄목은 오빠와 같은 국가반역죄였습니다). 그녀는 민중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왕비였다고 합니다. 어떤 설에 따르면 그녀가 귀여워하던 개도 민중의 증오를 받아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채로 처형을 집행하는 방식과 달리 그녀는 칼날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위를 올려다 본 채로 처형을 집행하였다고도 합니다. 민중들은 혁명 이전부터 그녀의 사치가 나라를 거덜내고 있다며, '적자부인Madame Déficit'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당시에 간행된 포르노그라피는 그녀가 신하들과 불륜을 맺고 있었으며 심지어 귀족 부인들과 동성애를 즐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처형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사치스럽고 음란하며 나라를 망친 여자로 각인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했다는 저 문구가 그녀의 이미지를 결정지었습니다. 백성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온갖 사치와 향락을 누리고 더러운 짓거리를 일삼다가 생각 없이 툭 비웃듯 내뱉은 말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니, 정말이지 어떻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왕비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만도 했고, 목이 잘릴 만 했던 것이지요.



[마리 앙투아네트]






그런데, 사치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면 그녀가 왕비로 있는 동안 프랑스 왕실의 소비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왕실의 예산은 법에 따라 국가 예산의 3%로 정해져 있었는데, 실제로 왕실 예산의 집행률은 고작해야 10% 남짓했다고 합니다. 루이 16세가 선대 왕들과 달리 검소한 성격이었고 - 나쁘게 말하면 품위 유지의 개념도 없는 왕이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사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가 마치 일반 백성들처럼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왕비가 되었을 때의 그녀는 도박, 연극, 무도회에 빠져서 밤 늦게까지 시간 가는줄 모르고 놀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십대 후반에 일시적인 유흥이었을 뿐 첫 딸인 마리 테레즈Marie Thérèse를 낳던 무렵에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이미 거리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왕비가 된 이후 루이 16세로부터 선물받은 프티 트리아농 궁은 사치와 향락의 궁전으로 소문 났지만, 실제로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수수한 궁전이었습니다. 일부 가구는 바리 백작부인Madame du Barry이 사용하던 것을 가져다 쓰기도 했지요. 궁을 꾸미는 데 든 비용은 약 20만 리브르였다고 합니다(리브르는 18세기까지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화폐단위 중 하나입니다. 당시의 20만 리브르는 현재 가치로는 대략 20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적자부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계기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서도 실상은 그녀는 이 사건에 대해 무고한 입장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사건은 한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찾아와 제 때 지불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대금을 요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후 공개재판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라 모트 백작부인Jeanne of Valois-Saint-Rémy이 꾸민 일로, 그녀는 세간에 왕비와 친분이 매우 두텁다고 알려졌으며 왕비에게 잘 보이고 출세하고자 하던 드 로앙 추기경Cardinal de Rohan에게 왕비가 비밀리에 그 목걸이를 갖고자 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드 로앙 추기경은 목걸이를 할부로 구매하여 백작부인에게 건넸고, 목걸이는 백작부인이 꿀꺽한 후 해체하여 런던에서 각각의 다이아몬드를 팔아치웠다고 합니다. 뇌물인지라 추기경도 왕비에게 이를 확인해 볼 수 없었는데 (배달사고가 났는지 안 났는지 대 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 추기경이 대금으로 지급한 수표 금액 중 일부가 제 때 지급되지 않자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추기경은 왕비가 비밀리에 이를 원했다는 친필편지를 증거로 제시했지만 성(姓)을 쓰지 않는 왕족의 서명이 'Marie Antoinette de France'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본 루이 16세는 추기경이 허술하게 조작된 편지를 가지고 왕을 농락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화냈다고 합니다. 추기경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비를 직접 만난 일이 있음을 주장하였지만, 그 때 그가 왕비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사실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 고용한 니콜 돌리바Nicole Lequay d'Oliva라는 창녀였음이 밝혀졌구요. 재판 결과 속은 추기경에게는 무죄가, 라 모트 백작부인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 왕비의 이름을 팔아 저지른 사기로 결론내려졌지요 (심지어 왕비와의 친분도 사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중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 왕비의 사치와 뇌물수수를 가리기 위해 희생양으로 뽑혔다고 믿었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감옥에서 탈출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원래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루이 15세Louis XV가 자신의 정부인 뒤 바리 부인에게 선물하고자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지요. 계약은 공중에 떴고 루이 16세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것을 구매해서 뒤 바리 부인에게 선물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보석상은 원래 이를 왕비에게 팔고자 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너무 고가인데다가 애초에 자신이 싫어하던 바리 백작부인을 위해 제작된 목걸이를 살 의사가 없었습니다. 이 사기사건에서 추기경이 목걸이의 대금으로 지급한 금액은 2백만 리브르, 프티 트리아농 궁의 개축비용의 10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고했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고하게 민중에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복원된 목걸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건 위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녀가 민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원래 오랜 적대국가였고 다만 7년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과 프로이센을 상대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을 뿐이었습니다. 애시당초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온 것도 그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적대감은 몇 년의 동맹이나 결혼 정도로 사그라들지는 않는 것이어서 그녀가 처음 왔을 때부터 프랑스 사람들은 그녀를 '오스트리아년Autrichienne'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원래 저 단어는 오스트리아 여자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뒷부분인 chienne가 암캐(chienne)와 같아 그 부분을 강조하여 발음했다고 하네요. 심지어 결혼 초기에는 루이 16세조차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할아버지인 루이 15세는 그녀를 귀여워했다고 하지만 루이 15세가 사망하던 당시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큰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후계자를 생산하는) 왕비의 책무를 다 하지 않고 파티에만 빠져 있다고 비난했지요. 루이 16세가 정부(情婦)를 두지 않은 것도 그녀가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의 관례에 따르면 외국 공주 출신인 왕비는 궁에서 아이나 낳으면서 지내고 실제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은 왕의 정부가 수행하였습니다. 루이 16세는 여색에 큰 관심이 없어서 죽을 때까지 정부를 두지도 않았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결과 루이 16세는 성불구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쥐어 잡고 사는 사납고 드센 여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문제점이,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이나 (초기) 언론인이 공격하기에 좋은 대상이었던 정부가 없어지자 그 비난의 화살이 왕비를 향했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이 정부에게 값비싼 보석류를 선물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녀들의 사치스러움과 정부라는 비도덕적 신분은 비난하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지만 그 대상이 사라지자 그들은 왕비를 그 자리에 대신 세워 놓았던 것입니다. 왕비라는 지위는 비도덕적이지 않지만 왕비가 불륜을 저지르고 동성애를 즐기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기에 딱 좋은 그림이었겠지요. 사치스럽고 음란하고 왕을 좌지우지하는 적국의 스파이인 오스트리아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포르노그라피가 출판되었고 그녀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확고하게 굳어졌습니다.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는 상냥한 왕비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가 싫어했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는데, 바리 백작부인과 드 로앙 추기경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어려서부터 매우 보수적인 교육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의 정부인 바리 백작부인을 매우 경멸했다고 합니다. 관례에 따르면 지체가 낮은 사람은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떤 자리에서도 바리 백작부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비가 없었던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인은 당연히 세자빈인 마리 앙투아네트였고 바리 백작부인은 그녀와 단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루이 15세가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에 항의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Maria Theresa가 딸을 달래는 편지를 써 보내서 'il y a bien du monde à Versailles aujourd'hui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참 많군요'라고 겨우 첫 인사를 건넸다는 일도 매우 유명합니다. 드 로앙 추기경을 싫어했던 것은 그가 주 오스트리아 프랑스 대사로 부임한 동안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험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녀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는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상냥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궁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민중에게도 상냥한 왕비였습니다. 루이 16세가 사냥 도중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그 치료를 해 주기도 하였고, 농민들의 밭을 망칠까봐 사냥이나 승마를 즐기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큰 딸인 마리 테레즈와 함께 빈민가를 방문하거나 빈민가의 아이들을 궁으로 초대하고 마리 테레즈에게 자신의 장난감을 선물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조르는 마리 테레즈에게 밖에 수많은 굶주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모두 줘 버려 정작 마리 테레즈의 신년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처음 시집왔을 당시 시고모인 루이 15세의 딸들이 거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이것이 엄격하지 못한 프랑스 왕실의 교육 탓이라 생각하여 자식 교육에 많은 신경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어린 마리 테레즈는 엄격한 어머니를 싫어하기도 했고 항상 오냐오냐 했던 아버지 루이 16세에게 더 많은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상냥함을 넘어서 그녀는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감자를 '악마의 작물'이라고 부르며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감자가 유럽에 알려진 것은 16세기 초이지만 프랑스에서는 18세기 중반까지도 감자를 먹으면 문둥병에 걸린다며 이를 식용화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7년 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수용소에서 감자를 재배하여 먹었던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는 감자가 당시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감자 보급을 호소한 그에게 루이 16세는 50에이커 정도의 경작지를 내 주어 감자를 재배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제빵학교를 열어 감자빵을 만드는 것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자에 흰 감자꽃을 꽂고 무도회에 나오거나 이런 모자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이는 유럽의 왕실과 상류층 여인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을 따라할 정도로 그녀의 옷차림인 대단한 뉴스거리였기 때문에 이것이 감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은 단지 그녀가 왕비였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녀의 패션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를 높이 들어올리는 푸프 스타일이나 18세기 상류층 여인의 복장으로 자리잡게 되는 무슬린 드레스는 그녀가 제일 먼저 유행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인테리어 쪽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단장하기도 했고 앞서 언급한 프티 트리아농 궁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가장 자연스러운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답게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하프 연주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신동으로 유명하던 6세의 모차르트가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왔다가 넘어졌는데, 자기를 일으켜 준 공주에게 즉석에서 청혼해서 주위 사람들을 모두 웃게 했다는 일화의 공주가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모차르트가 한 살 더 어렸지요.




[마리 앙투아네트, 12세, 1767년]






음란한 여자였다는 평가 역시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완고한 도덕주의자라고 불렸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e Thérèse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성의 정숙을 강조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여성의 성매매가 금지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성의 야간 통행까지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프랑스로 시집갔을 때 바리 백작부인과 갈등을 빚었던 것도 어려서부터 정숙함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받았던 가정교육이나 그녀가 자식들에게 했던 가정교육으로 미루어볼 때 저러한 평가는 당대에 또는 후대에 왜곡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 10세, 1727년]






남편을 휘어잡고 정치에 관여했다는 비난은 완전히 왜곡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많이 과장된 것입니다. 그녀가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이 16세가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왕당파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일종의 구심점으로 삼으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졌다고 하지요. 이 때가 1789년으로 그녀가 왕비가 된 지 15년도 더 지난 시점입니다. 이 때까지 그녀는 다른 프랑스 왕비들처럼 정치에 관심 없는 시절을 보냈고 루이 16세 역시 그녀가 정치에 간섭하게 두지 않았습니다.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어떻게 그녀를 통해 프랑스에 영향력을 확대해 보려고 했고 일반 민중들은 이를 염려하여 그녀를 오스트리아의 앞잡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그녀는 오빠의 요구를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왕비의 정치적 영향력은 1791년 6월에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녀가 정치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겨우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그녀는 치명적인 정치적 실책을 저지릅니다. 흔히 바렌느 도주 사건으로 알려진 프랑스 왕실의 파리 탈출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왕권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데 따른 불만과 혁명정부에 대한 루이 불신, 왕당파 개혁귀족인 미라보의 급사로 인한 불안, 부활절 미사를 위한 튈르리 출궁이 군중에 의해 좌절되어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인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프랑스 왕실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빠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왕비가 왕과 왕자, 공주들을 데리고 적국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적국의 군대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벌어지자 왕정과 왕실에 대한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여론이 한 순간에 부정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왕가는 1791년 6월 20일에 파리를 탈출하였고 3일 만에 바렌느에서 붙들려 다시 파리로 끌려왔습니다. 루이 16세는 바렌느 도주가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왕가는 납치되었던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며 9월 14일에는 1791년 헌법에 선서하여 일단은 입헌군주국의 국왕으로 복권[각주:1]되었지만 다음 해 발발한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혁명군이 패퇴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 7만이 파리에 근접하자 패배의 책임이 국왕 일가의 비협조와 내통에 있다고 믿고 튈르리 궁을 습격한 민중에 의해 8월 10일 다른 왕가 일원과 함께 탕플 탑에 유폐되었습니다. 9월 21일,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의 성립을 선언함으로써 루이 16세는 폐위되었으며, 혁명 전쟁 중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다음 해 1월 14일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각주:2]을 받아 21일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 처형되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고 마지막 몇 달 간은 폐결핵으로 고생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1793년 8월 1일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수감되었고 10월 14일 혁명정부에 의해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파티를 연 죄
    • 오스트리아에 수백 만 리브르를 유출한 죄
    • 아들을 프랑스의 왕으로 선언한 죄
    • 1792년의 학살을 교사한 죄
    • 아들과 근친상간 한 죄


그녀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시간으로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대부분의 혐의는 증거가 불충분하여 입증되지 않았으나 아들인 루이 17세가 근친상간의 혐의를 시인하는 증언을 함으로써 이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당시 8세 였던 루이 17세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가 7월 3일 앙투안 시몬이라는 구두 수선공에게 맡겨졌는데 심하게 학대받고 있었으며 뇌를 청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마약을 이용한 약물치료를 받는 등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판정에서 근친상간의 기소내용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Si je n’ai pas répondu c’est que la nature elle-même refuse de répondre à une telle accusation faite à une mère. J’en appelle à toutes celles qui peuvent se trouver ici !

내가 답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 어머니에 대한 그런 기소에 답변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이틀 후, 그녀는 콩코드 광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처형 당일, 그녀는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습니다. 편지에서 그녀는 국외로 탈출하지 않고 오빠 곁에 남아 있다가 함께 체포된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C'est à vous, ma sœur, que j'écris pour la dernière fois ; je viens d'être condamnée non pas à une mort honteuse, elle ne l'est que pour les criminels, mais à aller rejoindre votre frère. Comme lui innocente, j'espère montrer la même fermeté que lui dans ces derniers moments. Je suis calme comme on l'est quand la conscience ne reproche rien ; j'ai un profond regret d'abandonner mes pauvres enfants ; vous savez que je n'existais que pour eux, et vous, ma bonne et tendre sœur, vous qui avez par votre amitié tout sacrifié pour être avec nous, dans quelle position je vous laisse ! J'ai appris par le plaidoyer même du procès que ma fille était séparée de vous. Hélas ! la pauvre enfant, je n'ose pas lui écrire, elle ne recevrait pas ma lettre, je ne sais même pas si celle-ci vous parviendra, recevez pour eux deux ici ma bénédiction. J'espère qu'un jour, lorsqu'ils seront plus grands, ils pourront se réunir avec vous, et jouir en entier de vos tendres soins.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방금 선고를 받았어요. 하지만 그건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치욕적인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만날 수 있는 선고입니다. 결백했던 그 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마지막 순간에 의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평온합니다. 다만 불쌍한 내 아이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군요. 알다시피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살아 왔으니까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곁에 남았던 당신 -  착하고 다정한 여동생에게서도 떠나야 하는군요. 재판 과정에서야 겨우 딸아이가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것! 그 아이에게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아마 쓰더라도 받을 수 없겠지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도착할지도 알 수 없지만 이 편지에 아이들에 대한 축복을 담아 보냅니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당신을 만나 그 착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린 그녀의 아이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습니다.


"Qu'ils pensent tout deux à ce que je n'ai cessé de leur inspirer : que les principes et l'exécution de leurs devoirs sont la première base de la vie ; que leur amitié et leur confiance mutuelle en feront le bonheur ; qu'ils sentent enfin tous deux que, dans quelque position où ils pourront se trouver, ils ne seront vraiment heureux que par leur union, qu'ils prennent exemple de nous : combien dans nos malheurs, notre amitié nous a donné de consolations, et dans le bonheur on jouit doublement quand on peut le partager avec un ami ; et où en trouver de plus tendre, de plus cher que dans sa propre famille. Que mon fils n'oublie jamais les derniers mots de son père que je lui répète expressément : qu'il ne cherche jamais à venger notre nom.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원칙이라는 것을, 서로 우애를 나누고 믿으면 행복해 지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닮았으면 좋겠네요. 그 불운한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우정이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은 친구와 나누면 배가 되고 가족만큼 진실한 친구를 어디에서 또 구할 수 있겠어요. 우리 아들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를 대신해 복수하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Je pardonne à tous mes ennemis le mal qu'ils m'ont fait. Je dis ici adieu à mes tantes et et à tous mes frères et sœurs. Mon Dieu ayez pitié de moi ! Mes yeux n'ont plus de larmes pour pleurer pour vous mes pauvres enfants. Adieu, Adieu !

나는 나의 적들이 나에게 한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이제 고모들과 형제 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겠습니다. 신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더 이상 당신과 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안녕, 안녕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편지]






그녀의 편지는 결국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반 년 후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되었고 아들인 루이 17세는 2년 후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는 3년 후 오스트리아로 추방될 때가 되어서야 어머니와 고모가 처형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평생토록 프랑스 민중은 물론이고 어머니를 죽음에 몰아넣는 증언을 한 동생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를 깎이고 거름통을 싣는 마차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 갔는데, 그녀가 소원했던 것처럼 의연했다고 합니다.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그녀는 실수로 집행관의 발을 밟았고 평소 그녀의 모습대로 사과했습니다.


"Monsieur, je vous demande pardon. Je ne l'ai pas fait exprès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원래 프랑스 왕가로 시집오기로 되어 있던 것은 그녀의 바로 윗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Maria Karolina습니다. 그러나 나폴리 왕가로 시집가게 되어 있던 아홉번 째 언니인 마리아 요세파Maria Josepha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마리아 카롤리나가 나폴리 왕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특별히 친했던 마리아 카롤리나는 동생이 처형당한 이후 평생 프랑스 인들을 증오했고 궁중에서의 프랑스어 사용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전에 국민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했고 근친상간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으며 죽어서는 사치스럽고 방탕하고 음란하며 개념 없는 왕비로 기억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입헌군주국의 왕비였을 그녀에게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이 불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혁명 정부는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루머를 퍼뜨렸고 이를 믿은 민중은 바렌느에서 붙잡은 왕실 마차를 파리로 호송하면서 '빵집 주인과 마누라, 그 애새끼들을 호송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말이 등장하는 곳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저서 '참회록Les Confessions'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공주가 빵이 없다는 농부들에게 브리오슈를 먹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공주가 알고 있는 빵의 이름은 브리오슈 뿐이었고, 이것은 자기가 먹을 빵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주려는 호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루소는 1766년부터 이 책을 집필하였고 1770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해에 열네 살의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 왔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독일식 이름입니다.

  1. 이전까지는 왕권신수설에 따른 국왕이었으며 1791년 헌법에서는 국왕을 국가를 대표하는 종신세습 관료의 지위로 규정 [본문으로]
  2. 1월 14일 재판에서의 판결은 유죄-사형 361표, 유죄-집행유예 26표, 무죄 334표였으며, 1월 18일 사형을 집행할 것인가에 대한 재투표에서 찬성 380표 반대 310표로 사형 집행이 확정되었음 [본문으로]

'늑대별 되기 > 짧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며  (0) 2014.03.11
방공식별구역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보며  (1) 2013.12.02
기부  (1) 2013.05.02
그 날을 기억합니다  (7) 2010.05.18
서재응과 정근우의 신경전  (1) 2009.10.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