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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의의 중 하나는 식민제국 시대에 더 이상 유럽의 문제가 유럽 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점인데 이는 정작 전후 유럽의 갈등이 유럽 내에만 국한되는 행태를 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일종의 아이러니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을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전역을 무대로 하였지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곳은 북아프리카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른 하나의 의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기록적인 인명피해가 이를 지켜본 모든 국가에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랜 평화를 경험한 후에는 전쟁을 더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수도 있지만, 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에는 오직 전쟁의 두려움 만을 깊이 깨닫게 될 뿐 그 참상에 익숙해질 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직접적인 위협 뿐만 아니라 현재의 평화 상태를 부정하거나 현재 상태의 변동을 원하는 어떠한 암시와 같은 간접적인 위협 또한 필요 이상으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동안 서유럽의 대 독일 외교전략이었던 유화정책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란 잘 꾸며진 이야기와도 같아서 그 일이 모두 벌어지고 난 다음에는 마치 수많은 사건들이 나름대로의 필연성을 가지고 반드시 그렇게 흘러갔을 수 밖에 없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필연적인 진행으로 보이는 사건들의 상당수는 발생 가능했던 여러 대안 중의 하나일 뿐이거나 심지어는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후세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 특히나 히틀러와 나치당의 존재로 인하여 - 전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전간기 당시에는 그 기간이 전간기가 아니었습니다. 마법과도 같은 독일의 화려한 승리는 보통 전간기에 겉으로는 유화정책에 영합하는 듯 하면서도 속으로는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독일의 이중적인 정책의 결과물로 인식되고, 유화정책을 지지했던 서유럽의 정치가나 대중은 겉과 속이 다른 독일에게 속은 순진한 또는 선한 희생자이거나 뼛속부터 악한 존재인 나치당을 믿어보려고 노력했던 이상주의자 또는 독일을 두려워 해서 무엇이든 내 줄 준비가 되어 있던 겁쟁이로 그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사실 독일의 승리는 그들의 군사력보다는 일종의 행운이 더해진 그들 자신의 군사전략에 더 많이 기인하고 있었으며 그 보다도 전쟁 직전 몇 년간 또는 전쟁 직후 몇 달간 소련이 보여준 치명적인 전략적 실책으로 더 쉽게 설명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더한 것보다도 독일의 승리를 화려하게 치장해 준 것은 서유럽이 가지고 있던 독일 제3제국의 허상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간기 서유럽의 유화정책이 유효한 정책이었는지, 일반적으로는 유효한 정책이었겠지만 상대가 히틀러와 나치당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실패한 정책이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거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필연성'이라는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비슷한 다른 사건 -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 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교훈을 되살릴 수 있겠지요.
전간기 유럽 외교라는 판에서 히틀러는 분명 희대의 타짜였습니다. 그는 결코 좋은 패를 손에 쥐었던 적도 없고 적당한 타이밍에 죽거나 자신의 패를 살짝 보여주는 심리전에 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희대의 타짜일 수 있었던 가장 큰 방법은 그 자신의 패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지요. 히틀러가 구사한 유사한 심리전은 자신이 블러핑을 한다는 것을 상대가 결코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서유럽 국가들은 오로지 판돈을 올리기만 하는 그의 베팅을 보면서 히틀러의 패를 확인하는 부담을 짊어지는 것과 적당한 손실만을 감수하고 손을 터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았고, 히틀러가 강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불안감으로 인해 그들은 적당한 선에서 게임을 접기를 원했습니다. 서유럽의 불행은 그들이 게임을 접은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히틀러와 다음 게임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중유럽의 불행은 그러한 게임판이 마련될 때마다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서유럽을 대신하여 그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판만 끝내고 나면 더 이상의 게임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유화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고, 어쨌든 이번 판을 끝내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중유럽이 대신 지불할 것이라는 사실은 유화정책의 현실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서유럽 국가가 전쟁을 두려워 한 것처럼 서유럽 국가의 군대 역시 전쟁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군대'의 오명을 뒤집어 쓰는 대신 '전쟁의 참상을 두려워 하는 군대'가 되길 원했으며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단독으로 피해 없이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두려움은 게임이 반복되면서 확고한 공포로 변해 갔습니다. 서유럽의 자세는 마치 전쟁만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 줄 수 있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그들 자신과는 상관 없는 중유럽 국가의 독립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라인란트를 재점령하고 베르사유 조약을 철폐했으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데텐란트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그 다음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체가 도마 위에 올려졌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중재로 열린 4자 회담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이 독일 제3제국에 편입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잘 훈련된 군대와 끝까지 독일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 준비는 어디까지나 기존에 약속된 서유럽의 지원을 가정한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는 체코의 결의가 높은만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서유럽의 공포감도 높아졌습니다. 서유럽은 체코가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는 너무나도 합당하고 정의로운 서유럽의 제안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면 서유럽은 더 이상 기존에 체코에 약속하였던 안전보장 의무를 준수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체코의 용기는 꺾였고, 체코 대표단은 4자 회담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고 나라 전체를 독일에 넘기는 문서에 서명할 것만을 강요 받았습니다.
뮌헨회담은 히틀러 최대의 외교적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체임벌린은 더 이상 그들 세대에서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럽에 드리웠던 전쟁의 공포가 물러갔습니다. 서유럽이 지불한 대가는 그들과 관계 없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었고, 게다가 그것은 사실 정의로운 결말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의 가장 큰 목적은 중부 유럽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강력한 독일 제국을 약체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배상금이 할당되었고 군사적으로는 제국군대의 해체가 요구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제국 각 지역이 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알사스와 로렌이 프랑스로, 슐레지엔이 덴마크로 할양되었고 특히 독일계 주민 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거대한 동부 영토가 폴란드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는 윌슨의 14개 조항에 따른 민족자결주의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으며,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독일 국민의 (히틀러가 아닌) 상실된 동부 영토의 회복 요구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습니다.
중유럽 국가에게 있어서 뮌헨회담은 그들이 두려워하던 사실 하나를 명약관화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서유럽의 안전보장 약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에게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그들이 한 번 협상을 시작하면 서유럽 국가들은 기존의 약속을 지키는 대신 그들에게 한 가지를 양보할 것을 요구할 것이며, 한 번 양보를 시작하면 끝내는 모든 것을 내 놓으라고 닥달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폴란드가 다다른 논리적 귀결은 아예 협상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939년 3월, 독일이 단치히의 독일 귀속을 요구하고 폴란드 회랑을 가로지르는 독일 본토와 단치히 간의 치외법권 지대를 요구하였을 때 폴란드는 아예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지만 이는 분명 전년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커다란 이유 한가지는 단치히에 대한 독일의 요구가 서유럽에게 있어서 보다 '정당한 요구'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이 상실한 영토라는 점은 동일하였지만 단치히는 오로지 군사 목적으로 독일로부터 떼네어진 도시로서 폴란드의 영토가 아니라 국제연맹이 관할하는 자유시였으며 주민 대부분이 독일계였을 뿐만 아니라 의회 역시 나치당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단치히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독일이 언젠가는 당연히 - 그리고 정당하게 - 요구할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으며, 이제 독일이 단치히의 제국 귀속을 요구하자 사실 이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논의를 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한 가지 걸리는 요구사항이 있다면 제국 본토와 단치히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일명 폴란드 회랑을 가로지르는 치외법권 지역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독일 본국과 단치히를 잇는 철도나 도로가 부설될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폴란드 주권 일정부분에 대한 요구였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폴란드의 양해가 필요했습니다. 물론, 단치히에 대한 독일의 요구는 너무 정당하다고 여겨진데다가 독일의 추가 요구사항 역시 사실 문제될 것도 없이 작은 것이라고 여겨져서 처음 독일이 이를 요구하였을 때는 이것이 어떤 큰 문제로 비화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독일은 폴란드 회랑을 가로지는 이른바 단치히 회랑에 대한 반대급부로 다른 곳의 영토를 교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요.
이에 대한 폴란드의 대응은 '무대응' 그 자체였습니다. 폴란드는 이미 독일과의 협상은 양보로 이어질 것이고 한 번의 양보는 결국 모든 것에 대한 양보로 이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년도의 체코슬로바키아 위기가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금방이라도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긴장감을 동반하며 각국의 외교활동을 채찍질하였다면, 폴란드 위기는 아무도 모르는 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협상장에 나오지 않았고 독일은 최초의 요구 이후 다른 요구사항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서야 서유럽 각국은 사태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폴란드를 협상장에 나가도록 채근하였지만 폴란드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폴란드가 이미 파악하고 있듯이 서유럽의 목적은 폴란드로 하여금 무언가를 독일에게 양보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란드는 협상장에 나가는 대신 과거 서유럽이 폴란드에게 약속하였던 안전보장 약속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폴란드를 협상장으로 끌어내려고 서유럽 국가들이 약속한 군사동맹, 안전보장의 약속은 다시 그들의 족쇄가 되었습니다.
서유럽 국가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닐 것으로 보였던 작은 사안이 어느새 작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만큼이나 진행되어 있는 것을 본 것이지요. 그들은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언젠가로 정해져 있는 히틀러의 시한이 다 되면 곧바로 독일 군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언젠가를 서유럽 국가들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뉘른베르크 당대회 날짜로 - 근거 없이 - 추측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시계는 실제로는 작년보다 3주일 빨랐습니다. 그가 언제나처럼 위협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하여 취한 군사행동 개시의 시한은 전년도에는 당대회 1주일 후였고 1939년에는 당대회 2주일 전이었습니다. 1938년에 긴장감은 뉘른베르크 당대회가 가까워지면서 극도록 고조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위기감은 서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무솔리니의 4자 회담을 무조건 지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뮌헨회담은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배제한 채 뉘른베르크 당대회와 히틀러의 공격명령 시한 사이에 열렸습니다. 그러나 1939년, 히틀러의 공격명령 시한인 8월 26일이 되었을 때에도 아직 긴장감은 그렇게 고조되지 않았습니다. 서유럽 국가들은 폴란들를 닥달하였지만 여전히 2주 정도의 시간은 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는 공격을 일주일 연기했습니다.
독일 군부는 히틀러가 계속하여 자신들을 수단으로 삼아 블러핑을 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상대가 콜을 하면 그들은 독일이 그 동안 블러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었습니다. 그들 둘다 상대가 콜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전쟁 준비가 끝나려면 최소한 4년은 더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와 군부의 유일한 차이라면 히틀러는 상대가 결코 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군부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서유럽은 끝까지 콜을 하지 않았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시간표에 갇혀 버렸습니다. 그는 8월 26일까지 서유럽이 손을 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폴란드에게 발목이 잡힌 서유럽은 그러지 못한 채 시한을 넘겼습니다. 히틀러는 요구를 철회할 수도 공격할 수도 없는 상태였고 그는 겨우 일주일을 벌었을 뿐이었습니다. 8월 26일부터 8월 30일까지 그는 누구보다도 초조하게 폴란드의 회답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8월 30일 폴란드가 최초로 독일과 접촉하였지만, 그 때도 폴란드는 단치히 문제를 협상할 전권대사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선택의 기로에 몰렸습니다. 그는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서유럽 국가들에게 그가 허풍을 쳤음을 선언할 수도 있었고 공격을 연기함으로써 군부에 그가 허풍을 쳤음을 선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 그가 가진 지금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그가 허풍을 무기로 삼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8월 31일, 전쟁개시 명령에 서명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정해진 시간표대로 발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틀러는 항상 전쟁을 위협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협의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유화정책은 그 태생 자체가 실패도 아니었고 그것이 히틀러에게 전쟁을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 날이 아니었더라도 전쟁이 반드시 났을 것이라고 단언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20년 전의 제1차 세계대전의 불완전한 마무리가 문제였다고 지적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적은 원래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도의 주장과 그 예측의 정확성이 유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여러모로 75년 전의 이 사건과 닮아 보입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는 사실 상당히 정당해 보입니다. 서유럽과 미국은 러시아의 행동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실제로 군사적으로 충돌을 감수할 생각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러시아는 몇 년 전부터 - 보다 실제적인 - 군사력을 앞세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왔습니다.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희생이 필요해 보이지만 우크라이나가 희생한다고 해서 긴장이 완전히 사라질 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75년 전의 히틀러처럼 지금의 푸틴 역시 민주적 절차와 합의보다는 개인의 리더쉽에 그 권위를 더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리더쉽에 손상이 갈 만한 결과를 받아들일 여유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 이전의 강대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처럼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전의 강대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진행 중인 위기를 숨 죽이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 미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저 위기의 순간으로 평가받을까요, 아니면 냉전과 -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에 의해 촉발된 - 열전 사이의 전간기로 평가받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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