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포리율

폭풍의 9회말

iulius 2009. 5. 13. 17:55
== 타임 아웃이 없는 시합 ==

H2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만화를 좋아하시거나 야구를 좋아하시거나 하는 분들은 아마 한 번쯤 들어봤을만한 일본 소년 야구만화지요. 1992년에 나왔던 이 만화에서 주인공 쿠니미 히로는 중학 야구계를 평정한 최고의 투수이지만 팔꿈치 부상이라는 진단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를 포기합니다. 아예 미련을 없애겠다고 골라들어간 곳이 야구부가 없는 센까와(千川) 고교였죠. 이곳에는 학교 뒷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는 수준인 야구동호회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야구 대신에 히로가 선택한 종목은 축구. 어느 날 축구부와 야구동호회 간의 연습경기가 벌어지고 히로눈 축구부의 포수로 경기에 출전합니다. 의외의 에이스인 축구부의 키네의 역투에 야구동호회는 큰 점수차의 리드를 당하는데, 그 때부터 축구부가 경기에 집중을 하지 않고 대충대충 느슨한 플레이를 하죠. 일부러 만루상황을 만들어 준다든지 발로 송구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자신의 청춘이었던 야구가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히로는 그 경기 도중 축구부를 탈퇴하고 야구동호회에 가입합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판단하는 축구부 주장에게 히로가 한 마디를 던지죠. 타임 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주겠다고.



축구와 야구의 큰 차이 중 하나는 경기가 정해진 시간 안에 진행되느냐 아니냐입니다. 축구는 후반 10분을 남기고 다섯 골 차이라면 승부는 완전히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야구는 이론적으로는 몇 점 차이로 지고 있든지 9회말 쓰리 아웃을 잡기 전까지는 승부가 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흔히 "야구는 9회말 투 아웃부터"라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9회말 투 아웃에 5점차로 뒤지고 있는 것을 쉽게 뒤집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1년에 많이 나와봐야 모든 팀을 통틀어 두세 번 나오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28년의 프로야구 역사상 9회말에 가장 많은 득점은 6득점이었고, 따라서 최다점수차 역전승리 기록도 5점차를 뒤집은 것이었죠. 9회말에 5점 차이라면 아무래도 그날 경기를 포기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시 20 대 15 정도의 난타전이 벌어지고 있다면 몰라도 6 대 1 또는 5 대 0 이라면 사실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죠.

어제 LG가 그랬습니다. 8회말까지 4 대 1로 끌려가고 있었고, 그나마도 7회 무사 1, 2루의 찬스와 8회 무사 만루의 찬스에서 겨우 한 점 만회하는데 그치는 집중력 없는 경기를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특히, 7회말 무사 1, 2루에서 이대형이 볼카운트 2-3 상황에서 어이 없는 볼을 커트해 다음 공에 삼진을 당한 장면이나 이어지는 1사 1, 2루에서 안치용의 본헤드 플레이로 1사 만루 찬스가 2사 1, 2루로 뒤집히던 장면, 그리고 8회말 무사 만루에서 이진영의 병살타 등 마지막 찬스라고 생각되던 순간마다 허탈하게 공격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더욱 실망스러웠죠.

7회와 8회의 공격은 LG 입장에서는 마지막, 그리고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감독은 7회 타율이 낮은 주전 유격수 권용관의 대타로 이대형을 썼고, 8회에는 안치용, 박용택 등을 빼고 박경수, 이병규를 투입했습니다. 덕분에 9회초 수비에서는 손목 부상 중인 박경수가 2루에 들어갔고 박용근이 유격수를 보게 되었죠. 내야가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9회초. SK는 투 아웃을 당한 상태에서 유격수 박용근의 실책으로 흔들린 LG의 5번째 투수 이재영을 난타하며 5점을 냈습니다. 밟을 때는 확실히 밟는다, 몇 점차로 이기고 있든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SK의 팀컬러 그대로였죠. 그냥 9 대 1이 아니라 수많은 찬스에서 어이없이 물러나고 상대에게는 점수를 헌납해서 만들어진 9 대 1이었습니다. 오늘 경기가 문제가 아니라 내일, 모레의 남은 경기가 걱정되기 시작한 상황이었죠. 2008년 LG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 폭풍의 9회말 ==

9회말, 선두타자는 맏형 김정민이었습니다. 최근 8연승의 최고 수훈선수로 꼽히는 그는 좌전안타로 출루해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이대형을 대신해 들어온 조인성이 좌중간의 안타로 무사 주자 1, 2루를 만들었죠. 7회부터 계속된 무사 주자 1, 2루의 좋은 기회에서 김태완이 볼넷으로 걸어나가며 8회에 이어 두 번째 무사 만루의 찬스가 왔습니다.

솔직히 이 때 했던 생각은 질 때 지더라도 시원하게 서너 점만 뽑고 지자, 안 그러면 내일 경기에 완전 말리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루홈런을 두 번 쳐야 동점이 되는 상황. 9회말 공격의 경우 홈런을 쳐서 동점이 되지 않으면 투수에게 주자가 없는 편한 상황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연타를 치는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연타로 친다면, 최소한 김태완이 한 번 더 타석에 들어서야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죠. 힘도 쓰지 못하고 자멸하는 것으로 끝나지만은 말았으면 했습니다.

무사 만루에서 이병규는 2루 땅볼을 쳤습니다. 그나마 공이 느려서 타자 주자만 아웃된 게 다행이었죠. 한 점을 따라붙긴 했지만 이제 1사 2, 3루가 되었습니다.

[9회말 무사 만루에서 이병규의 2루 땅볼로 득점하는 김정민]

그 때까지만 해도 9회말의 공격이 폭풍처럼 몰아칠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9회말의 2루 땅볼은 아웃카운트 하나의 차이일 뿐 8회말의 병살타와 다름 없어 보였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때부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9회말 LG 공격
 선두타자  8번타자 김정민 좌전안타  9 대 1 
 무사 1루  9번타자  조인성  중전안타  9 대 1 
 무사 1, 2루  1번타자 김태완  볼넷  9 대 1
 무사 만루  2번타자 이병규  2루땅볼  9 대 2 
 1사 2, 3루  3번타자 정성훈  우전 2루타  9 대 4 
 1사 2루  4번타자 페타지니  중전안타 9 대 4 
 1사 1, 3루  5번타자 최동수 좌전안타 9 대 6 
 1사 2루  6번타자  이진영  중전안타  9 대 7 
 1사 1루  7번타자 박경수 좌전안타 9 대 7 
 1사 1, 2루  8번타자 김정민  볼넷  9 대 7 
 1사 만루  9번타자 조인성 1루수 플라이  9 대 7 
 2사 만루  1번타자 김태완  좌전 2루타  9 대 9 
 2사 2, 3루  2번타자 이병규  볼넷  9 대 9 

김태완은 2사 만루에서 주자 두 명을 불러들이는 좌익수 옆으로 빠지는 2루타를 쳐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습니다. 이 두 점은 한국 프로야구의 9회말 득점기록을 6점에서 8점으로 경신하는 점수였죠.

박경수는 손목 부상으로 송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파울타구를 칠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였죠. 그러면서도 결국 안타를 치고 나가 동점 득점을 올린 주자가 되었습니다.

[9회말 1사 2, 3루에서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치는 정성훈]

[9회말 1사에서 이진영의 적시타로 LG의 7점째를 올린 최동수]

[9회말 2사 만루에서 동점 2타점 2루타를 터뜨린 김태완]

LG 경기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것은 200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구단 홈페이지의 초기화면에는 마침 이런 사진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모두가 포기할 때, 모두가 현실을 받아들일 때, 선수들은 그 말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제외한) 팬들이 지난 수년간 포기하지 않았듯이 그들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해 역전패의 대명사였던 LG는 올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방심할 수 없는 승부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9회말 9 대 9 동점에 2사 만루 2-3 풀카운트 상황에서 정성훈은 중견수 방면으로 큼지막한 타구를 때렸습니다. 그 타구는 결국 중견수의 백글러브에 걸리고 말았지요. 연장으로 넘어간 경기에서 9회까지 총력을 퍼부은 LG는 야수자원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김정민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좌익수로 필드에 나섰죠. LG가 9회말 달라진 근성을 보여주었다면 SK는 10회초 강팀의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9 대 1에서 동점을 당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선두타자 볼넷, 보내기 번트에 이어 큼지막한 박경완의 2루타로 다시 한 점 앞서나갔습니다. 이제는 질 수가 없었습니다. 연장 10회말, 선두타자 페타지니가 중월 동점홈런을 쏘아 올리며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 여운 ==

여기까지가 LG 주연, SK 조연의 명승부였습니다. LG는 10회말 무사 1루의 찬스에서 이진영, 박경수, 김정민이 잇따라 뜬공으로 물러났고 이어진 11회말에서는 3자범퇴를 당했습니다. 12회초가 만약 심판의 오심 없이 진행되었다면 정성훈부터 시작되는 12회말의 LG타선에서는 어떤 결과를 내 놓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SK와 LG 모두에게 총력전이었고 LG는 8번째 투수 우규민이 퇴장당한 후에는 지명타자로 출전한 최동수가 등판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경기였습니다. 경기에 대한 선수들의 집중력과 집념만큼은 한국시리즈 7차전이라고 해도 아까울 정도로 대단했죠.

경기가 끝난 후 다음, 네이버, 쌍마, KBO 게시판은 심판을 욕하는 글들로 포화를 이루었습니다. 간혹 가다가 특정 선수를 비난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안치용이 7회에 본헤드 플레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때 한 점을 내고 9회말에 역전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9회말 이전에 있었던 모든 실수가 9회말의 드라마를 완성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10회에 최동수 안타 이후의 범타는 사실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만 9 대 9 동점을 이룬 그 순간부터 솔직히 저는 LG 선수단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제의 경기는 최악의 결과로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5시간 40분의 대혈투 끝에 결국 따라잡은 게 소용없게 되고, 그 동안의 총력전 때문에 자원 소모가 너무 심했으니까요. 아마 선수단의 허탈감도 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불펜을 아끼고 나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9 대 7 정도에서 지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명승부라는 것은 합리적이라고도 보일 수 있는 그런 계산을 뒤집어버렸기 때문에 명승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수단은 최강팀 SK를 상대로도 9회말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고, 남은 두 경기 반드시 승리하여 오늘의 명승부를 완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졌을 것입니다. 개성 넘치는 팀 LG가 단단한 결집력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팬들에게 LG의 달라진 모습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경기였다고 생각하구요.

이 경기에서는 계산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가슴이 찡했고 선수단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LG팬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죠. 마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던 김재현이 대타로 나와서 3루타성 안타를 치고 절뚝거리며 1루를 밟았던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요.

'포리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1) 2009.06.29
謹弔  (1) 2009.05.23
에이스와 마무리, 그리고 톱타자 - 5월 1일 대 히어로즈 전에 다녀오다  (1) 2009.05.02
동해를 두고 중립을 생각하다  (1) 2009.04.08
Launching  (0) 2009.04.08
댓글